▲ 정동영·정세균 민주당대표 후보가 지난 9월 26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서울시당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전북이 지지기반인 두 사람은 손 대표와의 경쟁에서 ‘이번엔 비(非)호남주자’라는 당심과 민심에 밀려 당내 서열 넘버 투, 넘버 스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내년 12월 손 대표가 대선 출마를 결정할 경우 다시 치르게 될 ‘패자 부활전’을 위해 당심을 ‘호남주자론’으로 바꿔놓아야만 주목받을 수 있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다.
전당대회가 열리던 날에도, 개표결과를 기다리는 와중에 벌어진 해프닝이 두 사람의 ‘상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날 정세균 최고위원은 대표직에 당선될 것으로 보고 미리 수락연설문을 준비해 안주머니에 넣어 놓고 있었다. 그 시각 정동영 최고위원은 미처 당선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지, 그 자리에서 열심히 수락연설문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정세균 최고위원에게 측근의 문자메시지가 전달됐다. ‘손학규 당선’. 이 문자를 확인한 정세균 대표는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정동영 최고위원에게 슬그머니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 순간, 두 패자는 얼굴을 마주보며,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수락연설문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나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향후 화려한 설욕전을 펼치기까지의 과정은 사뭇 다를 듯하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이번 전당대회에서 ‘썩어도 준치’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했다. 대선 도전 실패에 이은 탈당과 복당 과정에서 재출마의 명분도, 조직세라는 실리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무서운 바닥세를 복구하며 당내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킨 사실상의 승자였다.
반면, 정세균 최고위원은 절대 다수의 조직세를 앞세워 대표 연임을 자신했으나, 재집권 전망을 갈구했던 당심을 읽지 못한 실책을 뼈저리게 반성하면서 나름의 대선 비전을 만들어가야 하는 입장이다. 같고도 다른 길이 두 사람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다른 길은 지난 4일 손 대표가 주재한 첫 최고위원 회의에서도 드러났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지만, 정세균 최고위원은 불참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이 손 대표를 향해 당 운영에 대한 주문을 잔뜩 늘어놓고 있던 시각에, 정세균 최고위원은 측근들과 사퇴여부를 놓고 심각하게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정세균 최고위원은 “내가 대표경선에서 떨어진 것이지,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선된 게 아니지 않느냐”고 자신의 좌절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자리에 함께 모인 측근들 가운데 이번 전당대회에서 ‘유일한 낙선자’였던 최재성 의원만이 “이제 와서 최고위원직이 무슨 소용이냐”고 정 최고위원의 심경에 동조했다고 한다. 다른 측근들은 “민주당의 전통은 결과 승복과 당을 위한 협력이다. 선거 불복으로 비치면 향후 정치의 행로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만류했다.
결국 정 최고위원은 사흘 만인 지난 6일 손 대표의 광주 5·18민주묘역과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참배에 동행, “선당후사(先黨後私)다. 볕들 날이 있겠지”라면서 당무에 복귀했다. 이번 전당대회 결과를 받아들이는 정서부터 두 사람은 확연하게 다른 셈이다.
더욱 판이한 것은 당의 노선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준 장면은 지난 8일 최고위원 회의였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어제(7일) 인사청문회에서 김성환 외교부 장관 내정자는 부인했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FTA)와 관련해 비밀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도 독소 조항이 있는데 미국이 요구하는 자동차, 쇠고기, 섬유까지 일방적으로 들어준다면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오늘이라도 특위가 구성돼 당의 명백하고 명료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이인영, 천정배 최고위원이 동조하자 손 대표는 “FTA와 관련해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면서 한-EU FTA는 물론 한미 FTA 재협상 문제를 논의할 당내 특위 구성을 제안하며 수용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정동영 최고위원이 내세운 ‘담대한 진보’의 차원에서 제기한 의제를 손 대표가 ‘집토끼 잡기’가 우선이라는 인식에서 호응해준 것이다.
이 회의에서 정세균 최고위원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인식이 드러난 것은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서였다. 그는 “미국에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는 MB(이명박)식 재협상은 안 된다”며 “이미 정부가 합의한 내용을 존중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한미 FTA를 관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한국이 더욱 불리한 쪽으로 재협상이 전개될 것이 분명한 만큼 원안대로 가거나, 그게 아니면 협상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정동영 최고위원의 ‘무조건 재협상론’, 손 대표의 ‘신중한 재협상론’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었다. ‘빅3’ 간에 전당대회 경쟁에 이어 민주당 내부의 노선 경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한미 FTA 재협상론을 앞세워 자신의 진보 강화와 관련된 정책들이 당론으로 채택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이를 통해 손 대표의 ‘중도성향’과 대립각을 세우고, 차기 대안으로 입지를 넓혀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정세균 최고위원은 손 대표의 체제를 대립보다는 포섭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최고위원단 구성에서도 이인영 최고위원과 함께 지명직으로 임명된 김영춘 최고위원을 ‘우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손학규 체제에 맞서는 비주류 인식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보충하며 정치력을 강화하는 주류 인식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한 측근은 “전국 단위 선거에 대비한 기반 조직을 꾸준히 꾸려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동병상련의 처지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정동영, 정세균 최고위원. 치열한 노선 투쟁을 통해 재기를 노리고 있는 넘버 투, 넘버 스리의 고투가 앞으로 당내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을 더욱 가열시킬 것으로 보인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