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규 검찰총장 |
검찰의 사정바람이 매섭다. 웬만한 대기업의 이름이 불과 며칠 사이에 대부분 거명될 정도로 검찰의 칼날은 전 방위에 전광석화를 더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 ‘포격’은 정치인을 공습하기 위한 ‘사이렌’에 불과하다. 검찰이 그동안 ‘조용히’ 갈고 있던 칼은 정치권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벌써부터 정치권에는 검찰이 ‘딱 떨어지게 만든’ 여야 주요 정치인 리스트가 떠돌고 있다(10면 참조).
국회 국정감사 종료를 전후해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업의 비밀금고를 잇따라 ‘따고 있는’ 검찰. 그들이 독이 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검찰은 이명박 정권 들어 이렇다 할 실적을 올린 게 없다. 박연차 사건의 객관성 시비와 한명숙 전 총리 무죄 판결 등의 과정을 거치며 오히려 ‘물검찰’이라는 오명을 받아 왔다. 이번 대기업 비자금 및 정계 로비 사건 수사를 대하는 검찰의 자세는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검찰의 명예회복과 함께 청와대의 정무적 판단도 고려됐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레임덕을 막는 효과적 수단인 동시에, 최근 뜨고 있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 체제가 조기에 안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정국면을 확장시킬 가능성도 있다. 검찰발 사정바람의 후폭풍을 따라가 봤다.
검찰의 이번 기업 수사는 우연한 ‘덮치기’가 아니다. 서부지검에서 한화그룹과 태광그룹 등을 수사할 때만 해도 별건으로 처리돼 사정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감사가 끝나갈 무렵 대검 중수부가 1년 6개월 만에 C&그룹 비자금 수사로 ‘몸풀기’를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돌변하고 있다. 권력형 비리가 아니면 좀처럼 나서지 않는 대검 중수부의 성격상 이번 기업 수사는 정치권을 정면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특히 중수부의 에이스인 1과는 아직 사건을 배당받지 않았기 때문에 검찰이 향하는 칼날은 C&그룹이 아니라 재계 10위권에 드는 대기업 1~2곳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기업 수사도 결국은 정치인들을 잡기 위한 덫에 불과하다. 여의도가 검찰의 칼바람에 바짝 긴장하는 데에는 이명박 정권 들어 이렇다 할 정치인 사정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대로 걸릴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검찰이 이번 기업 수사에 그 사활을 걸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놓인 것도 사실이다. 검찰은 지난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이후 이렇다 할 대형 권력비리 수사 실적이 없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이 권력기관에 대한 강력한 컨트롤 기조를 유지하면서 검찰이 청와대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급기야 중수부는 지난해 5월 ‘박연차 게이트’ 수사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같은 해 6월부터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중수부 폐지론’이 거세게 일었고 검찰은 바짝 몸을 낮춘 채 조직을 추스르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여권 내부에서까지 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 주장과 ‘중수부 무용론’이 확산되는 등 검찰은 그 존재기반을 위협받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당연히 풍전등화의 검찰로서는 명예회복이 절실했고, 그 시험대가 바로 이번 기업 수사로 모아지고 있다.
김준규 총장은 지난 8월 취임 1년을 맞아 중수부에 ‘특수수사통’ 검사들을 전면 배치하며 수사 체제로 전환하고 기업 비리 첩보를 파악하는 활동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대검은 올해 들어 국제협력단 산하에 ‘국제자금추적팀’을 신설하고 해외 비자금 수사 준비를 꾸준히 해오는 등 철저한 기획 속에 이번 기업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철저한 기획과 준비가 어느 정도 이뤄지자 김준규 총장은 지난 10월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 국정감사에서 “1년 동안 예비군 체제로 운영되던 중수부가 최근 수사 체제에 들어갔고 수사는 시점 문제”라고 말해, 향후 중수부의 대대적인 수사 행보를 예고했다.
검찰 사정을 잘 아는 한 여권 관계자는 이에 대해 “검찰이 이번 기업 수사를 대하는 태도는 결연하기까지 하다. ‘본때를 보여 주겠다’라는 분위기다. 철저한 기획과 준비로 ‘딱 떨어지는 것만 하겠다’라며 자신감에 차 있다. 마음먹고 하는 것이고 끝까지 간다는 것을 검찰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수사 진도가 워낙 빨라 A 대기업은 이미 압수수색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고, B 대기업은 사장이 검찰 소환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C&그룹 비자금 수사는 해외에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라 G20 기간 동안 수사를 하고 G20이 끝나면 굴지의 대기업을 대상으로 해외에 빼돌린 비자금 수사를 할 것이라는 등의 시나리오도 이미 마련돼 있다는 얘기가 검찰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검찰이 이렇게 속전속결로 강하게 밀어붙이자 청와대 주변에서는 ‘속도를 조율해야 할 정도’라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또한 검찰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수사범위를 확대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진다. 여권에서는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C, D 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또 다른 친이계 실세인 E 씨도 모 기업의 로비 대상으로 검은 돈을 받았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야권에서는 거물급 중진의 이름이 나오는 등 검찰의 정치인 타깃은 여야의 핵심 인물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분위기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권력형 비리 수사는 통상 ‘기계적인 균형’을 맞춰왔다. 야권 인사만 칠 경우 그 정치적 부담이 그대로 이 대통령에게로 돌아가 오히려 레임덕이 심화될 수 있다. 듣기로는 여권 인사도 이번 기업 수사에 일부 연루된 것으로 안다. 검찰이 양쪽 균형을 잘 맞추겠지만 아무래도 ‘야당이 몸통, 여권이 깃털’ 정도의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여론조사전문가들은 그가 20%대에서 박스권을 형성할 경우 야권의 여타 주자에 비해 지속적인 비교우위를 보일 수 있고, 무엇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야권의 유일한 대항마로 인식돼 장기 대권 레이스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손 대표가 예상 외로 임기 초반부터 이렇게 지지율 상승 국면을 지속하자 한나라당도 ‘손 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단속적으로 흘리는 손 대표에 대한 비난성 공격이 오히려 그의 ‘야권 대권주자 입지 굳히기’를 도와주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손 대표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은 오히려 그를 야권의 대권주자로 키워주는 꼴밖에 안 된다. 그를 비리에 얼룩진 민주당 전체와 그 수장으로 연결시켜 공격해야 한다. 사실 검찰의 기업 수사는 주로 구여권 인사를 겨냥하고 있다. 손 대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인사들이 주로 거명된다. 하지만 민주당이 대검의 칼날에 큰 생채기가 생길 경우 손 대표 선에서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손 대표가 그동안 광폭행보로 좋은 점수를 받고 있지만, 검찰의 사정국면 조성 정국을 잘 이겨내지 못하면 야당의 수장으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짓고 정면승부를 했던 적이 있다. 손 대표도 상황에 따라 그렇게 적극적인 정무적 대응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그가 당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검찰의 칼날을 그냥 앉아서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 대표 리더십의 거품이 꺼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검찰의 사정국면 조성에 대한 손 대표의 대응이 대권으로 가는 1차 관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 이후 지금까지 그에 버금가는 대형 권력비리 수사를 제대로 한 것이 없다. 대선자금 수사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기관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국정철학을 견지했기 때문에 검찰이 청와대 눈치를 비교적 덜 보며 대형 권력비리를 파헤칠 수 있었다. 당시 송광수 전 검찰총장과 안대희 전 중수부장은 ‘국민검사’란 애칭까지 얻으며 전 국민적인 지지와 격려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 뒤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며 중립성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미운오리새끼”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 이명박 정권 들어 ‘강력한 친정체제 구축’이 국정운영의 주요 기조가 됐고 검찰도 살아 있는 권력의 지휘 아래 놓인 측면이 강했다. 이런 이명박 정권의 권력기관 컨트롤 기류는 ‘검찰의 기업 수사도 결국 여야의 잔챙이 정치인 몇 명 솎아내는 선에서 결론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으로 이어진다. 과연 검찰의 대기업 수사가 ‘어게인 2004’의 기억 속에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을 날이 오게 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