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은 C&그룹이 A 은행으로부터 수백 억원대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동교동계 핵심 인물인 K 전 의원이 개입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1일 대검 중수부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한 서울 장교동 C&그룹 본사.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중수부는 이 사건을 C&그룹 수사와는 별개로 다룬다는 방침을 세우고, A 은행 관계자들을 소환하는 등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K 전 의원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만큼 이번 내사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김 전 대통령 주변이나 당시 정권 실세들에게도 여파가 미칠 수도 있기 때문. 중수부가 K 전 의원과 A 은행 간에 이뤄졌던 은밀한 ‘거래’를 들추고 있는 내막을 따라가 봤다.
중수부가 지난 10월 C&그룹 수사에 착수하자 정치권엔 전운이 감돌았다. 검찰이 임병석 회장의 정계 로비로 메스를 들이댈 것이란 관측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엔 여야를 막론한 현역 정치인들 실명이 담겨 있는 이른바 ‘임병석 리스트’가 돌기도 했다. 검찰 역시 공식적으론 수사 확대에 대해 선을 그었지만 안팎에서는 총장 하명 사건을 다루는 중수부가 직접 나선 이상 정치권이 그 종착점이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실제로 중수부는 임 회장의 배임 및 횡령에 대한 수사는 일찌감치 마무리 짓고, 정계 인사들과의 커넥션 부분에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중수부 수사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임 회장이 정치권 로비에 대해 완강히 부인했을 뿐 아니라 관련 증거 확보도 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검찰은 임 회장을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했고 임 회장은 12월 10일 열린 1심에서 징역 5년에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 결과를 놓고 검찰 내에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중수부의 한 관계자는 “거의 퇴출 위기에 몰렸던 C&그룹이 1년 만에 기지개를 켠 중수부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임 회장 재판을 준비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동안 제기됐던 의혹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수사를 해나갈 것이다.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예상과는 달리 C&그룹 수사의 속도가 늦어지자 한때 중수부 내에서도 다급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중수부 내부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C&그룹에 대한 금융권 불법대출을 수사하던 도중 수상한 돈 흐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C&그룹은 지난 참여정부 시절 A 은행으로부터 수백억 원을 빌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일부가 K 전 의원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이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중수부는 K 전 의원이 당시 사세를 확장 중이던 C&그룹의 청탁을 받고 A 은행 대출을 알선해준 대가로 거액을 받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검찰의 한 고위 인사는 “C&그룹과 A 은행, 그리고 K 전 의원 사이에 어떤 구체적인 ‘딜’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게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수부는 K 전 의원이 국민의 정부 이후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고려, 참여정부의 또 다른 실세들이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예정이라고 한다. 앞서의 검찰 고위 인사는 “일선에서 은퇴했던 K 전 의원이 A 은행에 직접적인 압력을 넣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100억 원이라는 돈을 빼돌리기 위해선 당시 정권 인사의 비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아니냐”면서 “우선은 K 전 의원과 관련된 혐의를 입증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 뒤, 그 부분도 살펴볼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중수부 내사를 예사롭게 보지 않는 기류가 엿보인다. 동교동계에서 K 전 의원이 차지했던 위상이 크다는 점도 있지만 의혹에 연루된 곳이 바로 C&그룹과 A 은행이라는 까닭에서다. 사실 C&그룹 수사 이후 여의도에선 국민의 정부 시절 ‘실세’들로 꼽혔던 인사 3~4명 이름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실제로 중수부는 이들 중 일부에 대해서 내사를 진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동안 정치권에선 C&그룹이 국민의 정부 때부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 정권 차원의 ‘밀어주기’가 있었을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검찰이 확인 작업을 했던 것이다.
A 은행 역시 정권이 바뀐 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C&그룹과 마찬가지로 A 은행도 국민의 정부 때부터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정권 초 A 은행의 회장과 관련된 의혹들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몇몇 사정기관들은 자체적으로 이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해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A 은행이 DJ 정부 시절 실세들의 비자금 은닉처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특히 주목을 받았다.
동교동계와 민주당 인사들이 중수부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처럼 C&그룹과 A 은행이 주로 야권과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동교동계의 한 전직 의원은 “현 정권 출범 이후 검찰이 무기사업 비리 수사 등을 통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측근들 주변을 여러 번 파헤치려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것 아니냐”면서 “동교동계 핵심인 K 전 의원에 대한 내사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현 정권을 향해 연일 포격을 날리고 있는 ‘저격수’ 박지원 원내대표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추측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현 시점에서 국민의 정부 당시 의혹을 파헤친다는 것은 결국 DJ 비서실장이었던 박 대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중수부 역시 K 전 의원이 자금의 최종 귀착지는 아닐 것으로 보고 있다. K 전 의원은 ‘연결고리’일 뿐 ‘몸통’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수상한 자금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밝혀낸다면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검찰 주변의 전망이다. 중수부는 K 전 의원 관련 의혹을 C&그룹 수사를 통해 포착하기는 했지만, 별건으로 다룬다는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그만큼 사안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중수부 관계자는 “수사 실무진 사이에서 ‘대어’를 건질 것 같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면서 “K 전 의원과 A 은행 간 거래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더 큰 사건) 수사의 단초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K 전 의원 내사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