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비상금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다. 예상치 못한 술자리에서 한턱내야 할 때도 있고 갖고 싶은 물건이 눈에 밟힐 때도 있다. 하지만 기혼 남성 직장인들이 꼼꼼하고 날카로운 아내의 눈을 피해 비자금을 조성하기란 쉽지 않다. 월급 관리를 직접 하면 모를까 대부분 아내에게 경제권을 넘기다보니 푼돈도 아쉽다. 이 때문에 남몰래 비자금 조성에 돌입한다. ‘유리지갑’으로 불릴 정도로 투명한 직장인들의 월급이지만 기발한 방법들이 총동원돼 상당수의 직장인들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삥땅’의 기술을 모아봤다.
연말이라 술자리는 계속 이어지지만 늘어난 술자리만큼 용돈이 인상되지는 않는다. 연말이라고 월급이 늘어나지는 않기 때문. 컴퓨터 관련 업체에 근무하는 H 씨(33)는 이런 걱정에서 조금 자유롭다. 그는 아내 몰래 관리하는 통장이 따로 있다.
“사실 직장동료들도 많이 이용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송금하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쓸 수 있는 인터넷 뱅킹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일단 급여 계좌를 아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하나 더 만듭니다. 월급이 이 통장으로 이체되자마자 아내가 갖고 있는 통장으로 다시 이체해요. 보내는 사람을 회사이름으로 하면 감쪽같거든요. 대신 급여는 어지간하면 건드리지 않고 성과급에서 슬쩍합니다. 성과급도 100% 다 챙겼다간 위험해요. 많으면 50% 적게는 30%까지만 해야지 안 그러면 예민한 아내의 촉수에 걸릴 수 있어요. 욕심내서 100% 챙기다가 걸리는 동료들 벌써 여럿 본 걸요.”
H 씨는 매달 급여명세표를 따로 작성한다. 회사의 명세서 양식을 다운받아 본인이 챙긴 비자금 액수를 빼고 다시 작성한다고. 그는 “귀찮지만 명세서를 꼼꼼하게 읽어보는 아내 때문에 매달 작업을 한다”며 “그래도 이것 때문에 비자금이 두둑해져 생각만 해도 흐뭇할 때가 있다”고 웃었다.
급여통장을 따로 만드는 것과 수법은 비슷하지만 좀 더 정교한 사전 준비 계획과 고도의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방법이 있다. 무역업체에 근무하는 N 씨(36)의 이야기다.
“장기간 아내에게 회사가 그리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으며 내년도 임금인상이 어려울 것 같다고 지속적으로 얘기합니다. 갑자기 얘기를 꺼내는 것도 위험하고 표정관리, 잦은 야근, 퇴근 후의 연기력 등 모든 것이 잘 맞아야 해요. 이렇게 해서 지난해부터 분위기를 조성했고 올해부터 연봉인상 소급분을 챙기고 있습니다. 급여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인상분과 성과급의 일부를 빼고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다시 이체하는 거죠. 연차수당 특근수당 가족수당 등이 꼬박꼬박 나오는 좋은 회사지만 아내는 야박한 회사로 알고 있어요. 사장님한텐 죄송하지만 저도 살아야지요.”
비자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에너지 회사에 근무하는 L 씨(39)는 최고의 보안 기법을 사용한다.
“은행에 보안계좌라는 게 있습니다. 주거래 은행에 가서 비밀 계좌를 만들면 돼요. 이 계좌는 제 아이디로 은행 사이트에 로그인해도 잡히지 않아요. 대신 인터넷 뱅킹이나, 모바일 뱅킹, 폰뱅킹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꼭 은행으로 가거나 ATM(현금자동입출금기) 기계를 이용해야 하죠. 하지만 공인인증서, ID, 비밀번호 등을 모두 아내가 알고 있어도 절대 들킬 염려가 없으니 귀찮은 게 대수입니까. 신용카드도 하나 더 발급받아서 몰래 쓴 카드 대금도 이 계좌에서 자동이체하고 고지서 등 일체의 우편물은 아내가 모르는 이메일 주소로 받고 있어요. 평소에는 카드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 됩니다.”
비자금에 있어서 ‘간’까지 커지는 직장인들도 있다. 금속업체에 근무하는 K 씨(45)는 용감하게도 대출로 비자금을 조성한단다. 대신 이때는 총무팀 직원과 특별한 친분을 쌓아야 한다고.
“따로 모아둔 돈은 없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직장인 대상 소액대출을 받아서 이용했습니다. 친구들 만나 술도 한잔하고 여유 있게 보냈는데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그 다음이 문제더라고요. 한참을 고민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총무팀 직원한테 잘 보여서 무사히 해결했습니다. 100만 원 정도를 대출했는데 원금과 이자가 다달이 급여에서 나가거든요. 그 액수를 뺀 나머지로 급여명세표를 다시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죠. 총무팀 직원한테 점심도 사고, 커피도 사면서 아부 좀 떨었습니다. 그간 인센티브와 성과급으로 매달 급여가 조금씩 달랐던 데다 아내도 나이가 들어서 꼼꼼히 살피질 않아요. 아직까진 완전범죄입니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P 씨(32)는 도저히 급여에 손을 댈 수가 없다. 급여명세표를 아내가 직접 조회할 수 있기 때문. 대신 용돈을 쪼개서 아끼고 아껴 눈물겹게 비자금을 조성한다.
“기본적으로 받는 용돈에 포함된 게 점심 비용이나 담배, 커피 값이잖아요. 사실 담배는 지난해부터 끊었는데요, 아내한테 말을 안 해서 지금까지 하루 2500원씩 꼬박꼬박 받고 있어요. 그것만 해도 1년이면 90만 원이 넘거든요. 커피 값과 밥값을 합쳐서 1만 2000원을 받는데, 커피는 자판기 커피나 사무실에 비치된 걸 마십니다. 밥값은 어쩔 수 없이 들지만 가끔은 선배들이 사주기도 하거든요. 이런 자잘한 것들만 아껴도 한 달이면 20만 원 이상이 손에 들어옵니다. 이걸 CMA(종합자산관리계좌)에 꼬박꼬박 넣으면서 불어나는 액수를 보고 있으면 흐뭇하죠. 아직 ‘용처’는 생각 안 해 봤는데 통장만 보면 든든합니다.”
인테리어에 회사에 근무하는 Y 씨(30)는 신혼이지만 결혼하면서부터 비자금 조성에 들어갔다. 일찍부터 목돈을 떼어 준비했기 때문에 액수가 크다.
“결혼하면서 집 마련 비용에서 200만 원을 떼어 따로 개인 통장에 넣어놨죠. 그걸 시작으로 뒤늦게 결혼식에 참석 못한 친구나 친인척들을 통해서 들어온 축의금이 꽤 되더라고요. 한번은 비상금이 필요한 일이 생겼는데 아내도 아는 일이었거든요. 제가 가진 개인통장에서 비용을 대고 아는 사람한테 빌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죠. 좀 미안하지만 비자금은 보호해야죠.”
한 시장조사전문업체에 따르면 기혼 직장인의 50% 이상이 비자금을 조성한다고 답했다. 용돈만으로 살기에는 팍팍한 것이 사회생활인 셈이다. 하지만 비자금을 조성한 사람 4명 중 1명은 들키고 말았다니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