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과 김준규 검찰총장이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러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검찰이 유상봉 씨 수사에 착수한 것은 지난해 10월 초. 유 씨가 함바 운영권을 따내기 위해 대형 건설사를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11월 유 씨를 체포해 구속하고, 유 씨로부터 돈을 받은 건설사 임원들을 줄줄이 소환하며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당초 유 씨 개인 비리에 초점을 맞추던 검찰이 수사를 확대하기 시작한 것은 유 씨가 작성했던 수첩을 확보하면서부터다. 이 수첩엔 지난 10여 년간 유 씨가 만났던 정·관계 인사, 경찰, 공기업 임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또한 유 씨가 그들에게 돈을 건넸던 장소와 액수 등도 기록돼 있었다. 동부지검 관계자는 “(수첩을 입수한 후) 대형 게이트 사건이 될 것으로 직감했다. 확인을 더 해봐야 하겠지만 시중에 돌고 있는 ‘유상봉 리스트’ 중 일부는 맞다”고 귀띔했다.
검찰에 따르면 유 씨는 현재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 혐의에 대해서도 시인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유 씨는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스폰’을 해줬던 일부 인사들에 대해 강한 섭섭함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강희락 전 경찰청장도 그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수첩엔 기록해 두지 않았지만 지난 2008년부터 금품을 줬던 현 여권 인사들 이름도 3~4명 ‘자백’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엔 MB 대선캠프 출신들이 포함돼 있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적지 않은 파장이 일 전망이다. 일단 검찰은 유 씨 진술을 뒷받침할 물증 확보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는 상태다.
이런 가운데 최근 검찰이 친박계 중진 A 의원에 대한 내사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05년 A 의원 친인척이 유 씨 도움으로 경남 지역 함바 운영권을 따냈는데, 그 이후 A 의원이 유 씨의 ‘뒤’를 봐준 혐의를 조사 중이라고 한다. 검찰은 유 씨가 2006년 부산 공공기관 건설 현장 함바 운영권을 따내는데 A 의원이 도움을 준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유 씨 수첩에서도 A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기록을 발견했다고 한다. 동부지검 관계자는 “현재 여러 명의 정치권 인사들이 거론되고 있는데 A 의원이 내사 리스트 상위에 올라 있다”면서 “그러나 유 씨가 유독 A 의원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검찰은 유 씨가 함바 로비뿐 아니라 ‘윗선’과의 친분을 내세워 지난 2000년대 초부터 2005년 사이 각종 이권에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함바 비리의 불똥이 구여권으로 튈 가능성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 주변에선 이와 관련해 벌써부터 몇몇 호남지역 전직 의원들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특히 검찰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설립한 아태재단의 전직 한 임원이 유 씨와 정·관계 사이의 ‘연결고리’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인사들이 문제의 아태재단 전 임원을 통해 유 씨를 처음 만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미 해당 아태재단 전직 임원을 한 차례 소환해 조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유 씨는 지난 정권에서 금융권 거물로 불리던 P 씨와도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검찰은 P 씨와 유 씨 사이에 어떠한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내사 중이라고 한다.
이 같은 정황을 토대로 ‘검찰이 친박과 구여권을 겨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치권 일각에선 이번 함바 사건을 두고 여권 핵심부의 ‘기획 수사’ 아니냐는 의구심도 고개를 들고 있다. 사정정국을 조성해 이 대통령 레임덕을 방지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와대가 이미 지난해 12월 유 씨와 관련된 내용을 보고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러한 ‘기획 수사설’은 정가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선 캠프 출신의 한 여권 고위 관료는 “청와대와의 교감 없이 이러한 정·관계 게이트 수사를 진행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상식 아니겠느냐”면서 “민정라인에서 그 타깃이 주로 구여권 인사들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검찰 주변에서도 이번 동부지검의 함바 비리 수사는 청와대의 ‘묵인’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청와대는 이러한 관측들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배건기 청와대 전 감찰팀장, 장수만 방위사업청장 등 여권 인사들도 수사 리스트에 올라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때 함께 일했던 이른바 ‘S라인’ 인사 몇몇과 친이계의 유력 대선주자가 ‘유상봉 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자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지난해 검찰로부터 수사 상황을 전해 받을 당시엔 이들의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 일각에서 “검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청와대 정무라인 한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기획수사 얘기는 루머에 불과하고 또 우리가 일일이 수사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 당황스러운 측면이 있다. 오죽하면 민정팀 문책론까지 나오겠느냐”고 털어놨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청와대가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검찰이 여권의 일부 친이계 인사를 수사하는 것을 ‘형평성’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여의도에선 유상봉 리스트에 올라 있는 인사들의 무게감으로 봤을 때 친이보다는 친박과 구여권의 타격이 더욱 클 것이란 게 중론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청와대와 검찰 사이의 ‘이상기류’를 검찰 내부 사정과 연관 지어 바라보고 있다. 한화·태광·씨앤 등 최근 잇달아 대형 수사를 진행했던 검찰은 그 성과가 신통치 않아 안팎의 비난에 직면해 있는 상태다. 더군다나 함바 비리를 맡고 있는 동부지검은 지난해 다른 일선 지검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던 곳이다. 김준규 총장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와 동부지검으로선 ‘실적’이 아쉬운 때인 것이다. 김 총장이 함바 비리 수사를 직접 챙기며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년 검사장 인사를 앞두고 일선 지검 차장검사들이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부지검의 김강욱 차장검사가 수사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대검 중수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동부지검이 대어를 낚을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이재원 지검장, 김강욱 차장검사, 여환섭 부장검사 등은 검찰 내에서도 최고의 ‘특수통’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 내에선 수사 속도를 조절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자칫 ‘무리한 수사’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3일 강희락 전 경찰청장의 영장 기각으로 ‘속도 조절론’은 더욱 힘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자신을 전국구라고 자랑”
“TV를 보고서야 이름이 유상봉인 줄 알았다.” 지난 2004년부터 2005년 사이 브로커 유상봉 씨와 다섯 차례 만난 한 경찰 간부(총경급)의 말이다. 그는 유 씨로부터 ‘유상균’이라고 쓰인 명함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은 지난 1월 11일 <일요신문>과 그가 나눴던 일문일답이다.
- 유 씨를 처음 만난 계기는.
▲2004년 여름 당시 직속상관의 소개로 만났다. 그 상관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인사 중 한 명이다. 편하게 식사하는 자리로 알고 나갔는데 함바 운영권 얘기를 꺼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 실세들과의 친분을 과시했다고 하는데.
▲그건 맞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시 경남 지역에서 실력자로 알려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가깝다고 말했다. 또 금융권 인사들과도 친하니까 대출받을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자신은 ‘전국구’라고 자랑했다.
- 경찰 내부에선 이미 ‘유명 인사’였다고 하는데 평판이 어땠나.
▲극과 극이었다. 유 씨를 조심하라는 말이 동료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그러나 유 씨한테 잘 보이면 인사에서 유리하다는 말도 들렸다. 뒤탈이 있을까 우려해 될 수 있으면 안 보려고 했다. 결국 이번 사태가 터지는 것을 보니 그 때 조심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면 왜 다섯 차례나 만났나.
▲막무가내였다. 또 경찰 회식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한 유 씨 태도를 부담스러워하는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유 씨를 제어하지 못했다. 유 씨가 경찰 윗선과 가깝다는 소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 유 씨가 돈을 건네지는 않았나.
▲당연히 주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봉투를 주기에 다시 돌려줬다. 잘 모르는 사람 돈을 누가 그렇게 받겠느냐. 지금 생각해보면 유 씨가 대단히 자신감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서투른 로비를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