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 핵심부에서 취합한 재계 2·3세들의 문제 자료를 바탕으로 검찰·국세청·공정위 등 사정기관이 나서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는 정황이 포착됐다. 이는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이명박 대통령의 ‘령’이 재계에 먹히지 않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지난해 11월께부터 사정기관 정보 관련 담당자들에겐 ‘특별한 임무’가 하달됐다. 재계 2·3세와 관련된 자료들을 빠짐없이 수집하라는 것이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범죄와 관련된 첩보나 시중 동향을 모아서 정리하는 게 우리 파트의 주요 업무다. 그 지시를 받은 이후 대기업 자제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선적으로 보고했다”고 귀띔했다. 국세청뿐 아니라 경찰, 검찰 등 다른 사정기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각 기관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비슷한 시기에 재계 2·3세 관련 자료 수집에 나선 것에 대해 당시 정치권에선 ‘청와대 하명’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경찰청의 한 고위 인사도 “정권 차원에서 관심을 두는 사안이라고 들어서 실무자들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당시 사정기관들이 수집했던 파일들 중에는 재계 2·3세들의 금전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자관계와 같은 사생활 부분도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개인 신상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파악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친남매로 알려졌던 한 대기업 2세들이 사실은 ‘어머니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는 후문이다. 평소 예의 바르고 스마트한 이미지로 사내에서 평가가 좋았던 한 3세 경영인은 주사가 심해 자주 폭력 사태를 일으켜 총수 일가가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들은 청와대까지 보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정기관에서 제출한 보고서가 통상 민정팀과 비서실을 거쳐 VIP(대통령)에게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명박 대통령 역시 재계 2·3세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들을 접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여권 핵심부는 그간 모은 재계 2·3세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최근 사정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 혐의로 의심되는 사안들에 대해 검찰 국세청 공정위 등이 확인 작업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요신문>은 현재 몇몇 사정기관이 재계 2·3세 인사들을 내사하고 있는 정황을 포착했다. 우선 얼마 전 수장이 바뀐 서울중앙지검은 국내 4대 그룹 중 한 곳의 3세 경영인 A 씨가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집중 파헤치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물증을 확보한 상태여서 검찰은 혐의 입증을 자신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A 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코스닥업체 공금 800억 원가량을 빼돌렸다고 한다. A 씨가 자금을 횡령하던 시기에 이 회사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해 주주들에게도 큰 피해를 끼쳤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수사를 계속 진행 중인데 횡령 규모가 더욱 커질 것 같다. 죄질이 나쁜 만큼 구속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건설 화학 등의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는 국내 굴지 그룹에서 ‘차기 경영인’으로 일찌감치 낙점된 B 씨는 상습적으로 해외 원정 도박을 하고 있다는 ‘신빙성 있는’ 제보가 입수돼 경찰이 확인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과 동남아 지역 카지노에서 B 씨를 봤다는 목격자도 찾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룹 내부를 중심으로 B 씨가 출장을 핑계 삼아 도박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는데 경찰 내사에서 어느 정도 ‘팩트’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경찰에게 B 씨 관련 자료를 넘긴 소스원이 이 그룹 관계자라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다. 또한 경찰은 도박 자금의 출처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동안 B 씨의 비자금 조성 및 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지목받았던 몇몇 계열사 돈으로 도박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몇몇 유력 대기업 자제들이 서울 강남 지역의 한 고급 술집에서 ‘마약 파티’를 벌였다는 첩보의 경우 여러 사정기관이 심혈을 기울여 매달리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 일부 연예인들의 마약 복용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계 2·3세의 사례가 적발되면 그 충격파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고위급 인사는 “(마약 파티를 벌인) 장소와 시간대까지 파악했다. 대부분 유학을 하다가 인연을 쌓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접대하는 여성들과도 마약을 같이 했을 만큼 문란했다”고 전하면서 “사견이지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들이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처신하는 것을 어느 국민이 용서하겠느냐”고 꼬집기도 했다. 검찰은 마약을 유통·거래하는 데 관여한 흔적이 잡힌 한 중견기업 오너의 아들을 조만간 소환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국내 굴지 운송업체 일가 2세 경영인의 허위 학력 의혹과 친 MB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한 그룹 장손의 가정 폭력 등도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둘 다 법적인 처벌을 떠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것들이다.
이러한 사정기관들의 움직임을 두고 정가에선 여권 핵심부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최근 들어 재계에 대한 현 정권의 장악력이 느슨해진 듯한 기류가 보이자 청와대가 ‘칼’을 빼들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얼마 전 이 대통령은 기름 값과 통신비를 낮추라고 몇몇 대기업들을 압박했지만 논란만 가중됐을 뿐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해당 그룹들은 해명자료를 배포하며 공공연하게 정부를 향해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를 놓고 여권 내에선 분을 삭이지 못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형님 라인’으로 분류되는 한 친이계 의원은 “정부가 시장개입을 한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집권 후반기라는 것을 실감했다. 정권 초라면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재계에서 ‘2년만 버티면 된다’는 말들이 들리고 있다. 이래서야 남은 임기 동안 국정 운영이 잘 되겠느냐.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이 대통령이 당분간 재계를 향해 강수를 둘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여권 핵심부가 재계 2·3세를 사정 ‘타깃’으로 삼은 배경은 지난해부터 이어져왔던 대기업 수사에 대해 일각에서 ‘피로감’을 호소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친이계 핵심 의원들과 청와대 참모진조차도 ‘출구 전략’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재계 심장부를 향해 ‘사정 드라이브’를 거는 것을 놓고 정권 실세들이 부담감을 느꼈다는 말들도 나오고 있다. 대선캠프 출신의 한 고위 관료는 “검찰 수사 때문에 경제활동 못한다는 말을 그냥 투정으로 흘려듣긴 어려운 시점이다. 그렇다고 재계에 무작정 끌려 다닐 순 없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권 핵심부가 기업 입장으로선 ‘더 쓰릴 수 있는’ 자식 문제를 ‘히든카드’로 꺼내든 배경으로 받아들일 만한 대목이다. 재계 2·3세와 관련해 거론되는 사안들이 대부분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을 만한 소지가 커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고려요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재계에선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다른 형태의 ‘대기업 손보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정기관의 레이더망에 걸린 기업들 역시 전전긍긍해하면서도 ‘표적’이 된 데 대해 억울해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실제로 B 씨 소식을 들은 해당 그룹의 한 임원은 “총수 일가 일이라 잘 알지 못한다”면서도 “대기업들을 손에 쥐고 흔들겠다는 의도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도 “우리가 봉이냐.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재계 일각에서는 여권 핵심부의 ‘2·3세 사정’ 움직임을 두고 한 해 앞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을 연계해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정권의 명운이 걸린 선거의 계절을 앞두고 재계의 군기 잡기가 벌써부터 시작됐다는 의미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왕차관’ 봄날은 간다
“(이명박 대통령이) 좋아서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최근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가 ‘왕차관’으로 불리는 박영준 지식경제부 2차관과 관련해 작심하고 털어놓은 말이다. 정권 최고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박 차관을 향한 이 대통령 신임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정권 초부터 끊임없이 구설에 시달렸던 박 차관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VIP의 두터운 애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약해진 것 같다. 여권 내에서 박 차관 편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친이계 일각에서도 박 차관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우선 박 차관이 임태희 비서실장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퍼지고 있어 관심을 끈다. 박 차관과 임 실장은 대표적인 ‘형님 라인’(이상득계) 인사들이다. 정권 초만 하더라도 박 차관의 ‘힘’이 압도적으로 셌지만 현재는 명실상부 청와대 내 2인자인 임 실장이 ‘한 수 위’라는 평이 우세하다. 사실상 박 차관이 좌지우지했던 공기업과 정부부처 인사에 있어서도 지금은 임 실장 ‘입김’이 더 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박 차관과 관련된 잡음들이 계속되자 여권 내에서 의식적으로 ‘거리 두기’에 나섰다는 해석도 들린다. 특히 야권에서 또 다른 불법 민간인 사찰 건을 터트릴 것이란 정보가 전해지자 여권 일각에선 박 차관을 ‘조기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 차관 측이 “우리가 망하는 게 곧 정권이 죽는 길”이라며 불만을 털어놨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와 관련해 상당수 친이계 의원들은 “어찌 됐건 박 차관과 이명박 대통령은 공동운명체”라며 정가의 여러 얘기에 선을 그었다.
박 차관 측은 이러한 소문들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박 차관과 가까운 한 여권 관계자는 “박 차관은 여전히 이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임 실장과의 권력 다툼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 대통령이 지금까지 중용했겠느냐”면서 “박 차관이 최근 자원외교에 집중하고 정치권 현안에 대해 말을 아끼다 보니 이런 억측들이 나오는 것 같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박 차관이 19대 총선에서 고향(경북 칠곡)에 출마할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데 이 지역 출마 희망자들이 이런 루머를 퍼트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