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밸런타인 데이> 스틸컷. |
최근 식품 계열 회사로 이직한 H 씨(여·35)는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무심한 사람으로 찍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연인 사이도 아니고, 직장 동료지만 특별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14일이 되니까 아주 당연한 듯 남자 상사 분들이 초콜릿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나이가 있긴 하지만 아직 미혼이라 그런지 당당하게 요구하시더군요. 알고 보니 지금 회사는 그런 데이들을 굉장히 챙기는 분위기였어요. 준비한 게 없다고 하니까 센스가 없다는 둥, 무심하다는 둥 타박이 돌아오네요. 이런 일로 차가운 사람으로 매도되는 건 기분 나쁘죠. 다들 준비하던데 저만 안 줘서 아마 찍혔을 겁니다.”
물류회사 입사 3년차인 C 씨(여·28)도 각종 데이만 되면 마음이 무겁다. 부서 내에 여직원은 달랑 혼자,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느라 경제적인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마트에서 사오는 얄팍한 선물은 통하지도 않는단다.
“유부남들도 많은데 대충 주면 눈에 띄게 서운해 합니다. 부서 사람들만 챙기는데도 인원이 많다보니 남자친구 주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어요. 재작년에는 신입이라 일부러 신경 썼는데 그게 화근이었네요. 지난해에는 밸런타인데이가 설 연휴랑 겹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빼빼로데이라는 무서운 복병이 있었어요. 이번 14일도 부담이 커서 넘어가고 싶었는데 그러면 두고두고 한소리 들을 것 같아 챙겼어요. 다른 부서는 뭘 어떻게 받았네 하면서 자꾸 비교하거든요. 솔직히 입사 3년차 월급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받는 사람은 많지만 저는 혼자거든요. 이번 달은 적자예요.”
C 씨는 밸런타인데이를 이렇게 챙겼어도 다음 달 화이트데이는 기대도 않는다. 지난 2년간을 되돌려 보면 눈에 보인다고. 그는 “그렇게 하나하나 포장하고 정성 들여도 돌아오는 건 마트에서 산 종합 캔디 세트”라며 “그나마 다른 직원들과 나눠 먹어 제대로 남는 건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주고받고 챙겼던 각종 데이 때문에 전엔 몰랐던, 유쾌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의류회사에 근무하는 J 씨(여·32)의 얘기다.
“보통 직장에서 챙기면 동료들끼리 주고받고 하잖아요. 저희 회사는 챙기는 분위기가 아니라 매번 그냥 넘어갔는데 지난해에 초콜릿 과자가 책상에 놓여 있더라고요. 구매팀이라 업체에서 보낸 건데 괜히 기분이 좋았어요. 그러다 디자인팀에 갈 일이 있어 갔는데 못 볼 걸 봤습니다. 저희 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선물이 있었던 거죠. 업체 물품을 최종 확인하는 팀이다 보니 좀 더 신경 쓴 건 알겠는데 지나치게 차이가 나니 씁쓸하더군요. 이 사실을 알게 된 구매팀 직원 모두 서운해 했었습니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 업체한테 예전처럼 잘 대해주지 않아요.”
똑같이 힘들게 일하는데 은근히 각종 데이에 특정 부서가 더 대우를 받는 것 같아 속상하다는 J 씨는 “이런 의도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부서 간에 서먹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L 씨(여·26)도 밸런타인데이를 챙겼다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단다. 부서에서 막내다 보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남자 직원이 많지 않은 데다 제일 어리고 해서 안 챙길 수가 없더라고요.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서 준비했는데 그동안 저를 잘 대해 주고 신경 써 준 상사 한 분 것은 꽤 공을 들였어요. 이번 기회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드리고 싶었죠. 그런데 드릴 때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았는데 이후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부서 내에 다른 여직원과 사귀고 있는 거예요. 그 상사가 제가 준 선물 때문에 오해를 사서 그 여직원과 크게 싸웠다면서 티 나지 않게 오해를 좀 풀어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했던 저도 곤란했는데, 각자 개인 사정들을 속속들이 알고 준비할 수도 없고 참 애매하네요.”
선물이 오고가다 보면 자연스레 비교하는 경우가 생긴다. L 씨의 상사처럼 남들 몰래 사내연애를 하고 있는 S 씨(31)는 각종 데이만 되면 괴롭다. 금융권서 일하는 그는 때마다 여직원들이 뭘 받았는지 서로 경쟁하듯 이야기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늘 비교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데이들은 마케팅의 일환이기 때문에 안 챙기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여자친구도 같은 의견이라 그냥 넘어가거나 대충 챙기는 편인데요, 문제는 주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소신 있게 행동했더라도 여자 입장에서는 들리는 소리가 있는데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들어보면 굉장합니다. 지난해에도 여자친구가 들은 바로는 무슨 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했다, 수제 곰인형에 초콜릿이 든 바구니가 30만 원이 넘는 거라더라, 스파에 가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는데 좋았다더라…. 올해 화이트데이가 고민인데 사실 얼마 전부터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하려고 알아보고 있어요.”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P 씨(29)도 남자 동기 때문에 비교를 당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올해 밸런타인데이 때도 동기는 책상에 초콜릿이 여러 개 놓였더라고요. 심지어 택배로도 왔습니다. 바로 옆 제 책상은 텅텅 비었는데 말이죠. 받은 걸 같이 나눠먹자고 돌리는데 좀 머쓱했죠. 그냥 가만있으면 좋을 텐데 지난해에도 화이트데이나 빼빼로데이 때 여직원들한테 작은 초콜릿 하나씩을 돌리는 거예요. 이름도 예쁘게 프린트해서 붙여갖고 말이죠. 여직원들이 대하는 게 눈에 띄게 달라지더군요. 올해는 저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최근 한 취업포털이 20~30대 직장인 37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절반 정도의 남성 직장인들도 밸런타인데이에 직장 내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고 답했다. 직장 내에서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데이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반 넘는 직장인들이 이런 데이들이 부담스럽다고 답했다니 정말 챙기고 싶어서 하는 건지는 의문이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