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싸인>의 한 장면. |
지난 3월 3일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 위치한 하홍일 법의관의 연구실에 들어서자 사체를 썩지 않게 하는 포르말린 냄새가 기자의 코를 찔렀다. 연구실 벽에는 피해자의 이름과 사체 발견 장소, 사인 등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었고 일주일 일정을 기록한 보드판에는 하루 서너 건 정도의 부검 일정이 적혀 있었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하 법의관은 이미 오전 동안 시신 세 구를 부검한 후였다. 그는 손자가 휘두른 칼에 찔린 흔적이 남아 있는 할머니와 카메룬 출신의 이주노동자, 여관방에서 목을 매 사망한 여성의 시체를 부검한 후 오후 두 시께에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에는 사건 담당 형사들이 남기고 간 사건 현장 상황, 피의자 진술서, 녹음파일 등 사건 기록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 법의관은 이런 자료들을 면밀히 살피면서 피의자의 주장에 부합되는 흔적과 그렇지 않은 흔적을 찾아내 사인을 밝혀낸다. 노모를 사망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손자가 휘두른 칼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에 앓고 있던 심장질환 때문인지 밝혀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수사단계에서 기록된 각종 추정 사실들을 의학적 소견으로 밝혀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선 주인공들이 사인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지만 실제 상황에선 대화는 없다. 있다면 법의관과 말없는 시신과의 대화만 있을 뿐이다. 시신을 옆으로도 눕혀 보고 90도로 앉히기도 하고, 일으켜 세워보기도 한다. 칼에 찔린 자국의 경우 내부 장기에 가해진 힘과 칼날의 방향, 각도 등을 정확하게 알아낸다.
외국의 경우 부검한 후에도 의구심이 남아 있을 때 재부검할 수 있도록 사체를 보존하지만 우리나라는 한 번 부검한 사체는 화장시킨다. 또 미국의 경우 사체에 대한 부검 여부는 법으로 명시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규정이 없어 검사의 명령 없이는 부검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법의관이 망자의 이야기를 듣도록 허락된 시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하루 몇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 구의 시신 부검을 끝내면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는 시신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제한된 시간 안에 부검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처럼 옆 사람과 설전이 오고가는 일은 드물다. 물론 담당 형사와 대화하는 경우는 있다. 법의관이 사건 현장을 찾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형사들이 전하는 현장의 조그마한 단서들도 부검에 큰 영향을 끼친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법의관이 직접 관찰하면 좋겠지만 현재의 인력이나 제도상으로 불가능하다. 국내 법의관 수는 20명 안팎에 불과하고 국내엔 ‘검시법’도 아직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관이 사건 현장을 파악하는 일은 대부분 담당 형사들의 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피의자의 혐의에 부합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부검결과에 의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경우 법의관들은 형사들로부터 심리적으로 압박 아닌 압박을 받기도 한다.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단서인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과정에서 설전 아닌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수사관의 소견과는 정반대로 결론이 나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하 법의관은 네 구의 시신을 부검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시신은 목이 졸려 질식사한 중년 남성이었다. 사건 담당 수사관은 그에게 다가와 대강의 사건 내용을 전했다.
“아들이 거실로 나와보니까 아빠가 죽어 있었다고 하대요. 딱 보니 자살입니다.” 그러나 목에 남아 있는 끈의 자국은 누군가 잠들어 있는 남성의 목을 졸라 순식간에 사망케 한 살해 흔적이었다. 그의 소견을 전해들은 경찰은 신고 당시 아이가 ‘엄마가 숨진 아빠를 숨기려 하는 것 같다’고 말한 사실을 기억해냈고 추가 조사를 통해 남편의 외도를 추궁하던 아내가 계획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밝혀냈다.
이처럼 국과수의 소견 결과에 의해 자연사가 타살로, 타살이 자연사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하 법의관은 “대부분은 어느 정도 피의자가 확정된 상태에서 그에 부합된 소견이 나온다”며 “국과수가 반전을 연출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처럼 법의관에게도 좀 더 연민이 가는 죽음이 있을까. “일주일 동안 많게는 20여 건의 시신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어떤 죽음은 더 가슴에 와 닿고 어떤 죽음은 더 애착이 가고… 그런 건 드라마 속의 이야기죠. 일일이 각자의 사연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다 보면 아마 미쳐 버리지 않을까요.”
하 법의관은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돌아가는 시신처럼 지난 기억을 깨끗이 털어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또 다시 내일 그를 찾는 새로운 또 다른 죽음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