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2인자 이기붕, 부위원장 오른 김운용, 삼성 총수 이건희 등…공금유용·논문표절·셀프추천 등 잡음도
초대 IOC 위원은 이승만 정권 당시 2인자이던 이기붕 씨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이던 그는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1952년 대한체육회장이 되면서 체육계와의 인연을 맺어 1953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돼 IOC 위원까지 됐다. 다만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장남 강석 씨가 권총을 쏴 전 가족이 사망했다.
기막힌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롤스로이스는 아무에게나 차를 팔지 않았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전설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도 거절당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롤스로이스 차량을 의전차량으로 구매하고 싶었지만 롤스로이스가 거절했다. 그런데 몇 년 뒤 롤스로이스는 이기붕 씨에게 차량 무상 제공을 제안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구매 요구를 거절했던 롤스로이스가 IOC 위원에게는 무상 제공을 제안한 것이다. 난처한 상황에 몰린 이기붕 씨는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기붕 씨가 대한민국 초대 IOC 위원이 된 데에는 2대 IOC 위원 이상백 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IOC 위원을 배출하려면 해당 국가가 IOC에 가입해 올림픽에 참가해야 한다. 대한민국 체육계는 1946년 7월 런던올림픽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IOC에 가입하고 1948년 런던올림픽에 독립국가로 참가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바로 이상백 씨와 전경무 씨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이상백 씨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선수단으로 참가했고 일본 농구협회의 부회장과 일본체육회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전경무 씨는 미국대학웅변협회 회장을 맡을 만큼 영어 실력이 탁월했고 국제 감각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IOC 부위원장이던 에이버리 브런디지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는데 브런디지와 이상백 씨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만나 친분을 이어온 관계였다. 1947년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가던 전경무 씨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도 벌어졌지만 결국 IOC 가입과 올림픽 참가라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이후 이상백 씨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2년 동안 IOC 위원으로 활동했다.
3대 IOC 위원부터는 다시 정치인들이 맡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장기영 씨(1967~1977), 3선 국회의원인 김택수 씨(1977~1983),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 출신 박종규 씨(1984~1985) 등이 모두 정치인 출신이다. 다만 권력자가 논공행상 차원에서 측근 정치인에게 IOC 위원의 자리를 준 것보다는 체육계와 밀접했던 정치인들이 IOC 위원이 된 듯하다.
조선은행 행원으로 시작해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낸 뒤 1954년 한국일보를 창간해 사장 겸 발행인이 된 장기영 씨는 1964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입각한 박정희 대통령 시대 경제건설기를 대표하는 경제관료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1967년에 한국일보로 복귀하며 IOC 위원이 돼 심장마비로 타계한 1977년까지 활동했다.
1977년 12월 IOC 위원으로 선출된 김택수 씨는 1983년까지 활동했는데 1981년에는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경남고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김택수 씨는 1961년 경남체육회장을 맡으며 체육계에 입문한다. 평소 열렬한 복싱팬으로 1966년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회장 겸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을 맡았고 이후 대한체육회 회장을 거쳐 IOC 위원으로 활동했다.
김택수 씨는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된 정치인이다. 다만 3선 개헌 추진을 초반에 반대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눈밖에 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공천을 받지 못했다. 대신 1971년 대한체육회장이 된 김택수 씨는 1977년 장기영 씨가 사망하며 IOC 위원이 된다. IOC 위원 신분으로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며 정치규제를 당했다. 1983년 폐암으로 별세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피스톨 박’으로 유명한 박종규 씨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며 박정희, 김종필 등과 인연을 맺어 5·16 군사정변 당시 핵심 임무를 담당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경호대장, 청와대경호실차장, 경호실장 등을 역임했다. 이 시기 박종규 씨는 교육계와 체육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학교법인 경남학원을 설립해 경남대학 이사장이 됐으며 대한사격연맹 회장, 아시아사격연맹 회장 등도 맡았다. 1974년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뒤 세계사격연맹 부회장, 제10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사격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태릉국제사격장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박종규 씨는 1980년 5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계엄사령부의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 발표된 부정축재액이 77억 원이나 됐다. 이로써 정계를 은퇴하고 체육계 활동에 전념했다. 1979년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위원장이 됐고 태릉푸른동산 이사장, 아시아경기단체총연맹회장 등을 거쳐 1984년 IOC 위원이 됐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기도 했지만 1985년 사망하면서 1년 5개월의 짧은 재임 기간을 남겼다.
그 다음 IOC 위원은 태권도의 세계화를 이끈 김운용 씨다.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만 30세이던 1961년 관직에 들어선 뒤 외교관으로 활동해오던 그는 1971년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해 국기원을 설립하고 태권도 세계화를 주도했다. 1986년부터 2005년까지 20년가량 IOC 위원으로 활동하며 수석부위원장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일조했으며 1994년 IOC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는 성과도 만들어 냈다.
1992년에 그는 IOC 부위원장이 됐고 북한의 장웅 IOC 위원과 물밑 접촉을 거쳐 2000년 제27회 시드니올림픽의 역사적인 남북공동입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01년에는 제8대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해 2차 투표까지 갔지만 결국 자크 로게(벨기에)에게 패배했다. 그렇지만 IOC 역사상 최초의 제3세계 출신 유색인종 위원장 도전자가 됐을 만큼 김운용 씨는 국제 스포츠계의 거물이었다.
이후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에 연루돼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은 김운용 씨는 2004년 체육 단체 공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 추징금 7억 8800만 원의 형이 확정됐다. 이로 인해 IOC 위원에서 제명될 위기에 몰린 김 전 위원은 2005년 IOC 위원직을 사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른 데다 김운용 씨가 IOC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국제 스포츠계에서 대한민국의 역량이 확대되면서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김운용 당시 IOC 부위원장은 ‘올림픽을 치른 국가에 대해서는 IOC 위원을 추가로 배정할 수 있다’는 IOC 규정에 따라 꾸준히 IOC 추가선임을 추진했고 결국 이건희 씨가 1996년 IOC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새 IOC 위원이 됐다. 학창 시절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겸 국제레슬링연맹 명예부회장을 지내는 등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이뤄진 일이었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IOC 위원이 3명으로 늘어난다. 개인 자격으로 IOC 위원이 된 김운용, 이건희 씨와 달리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은 국제유도연맹(IJF) 회장 자격으로 IOC 위원이 됐다. 그렇지만 2005년 김운용 씨가 사임하고 2007년에는 박용성 씨가 두산그룹 경영에 매진하겠다며 IJF 회장을 사퇴해 자동으로 IOC 위원직을 상실했다. 이건희 씨 홀로 IOC 위원으로 남았지만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IOC 위원으로 활동이 어려워졌고 결국 2017년 IOC 위원직을 사퇴했다.
다행히 2008년 문대성 씨, 2016년 유승민 씨가 IOC 선수 위원이 되면서 명맥이 이어졌고 2019년 6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11대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현재는 이기흥 씨와 유승민 씨가 IOC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IOC 위원은 급여가 없는 명예직이지만 올림픽의 세계적인 위상 확대로 단순한 스포츠 외교관을 뛰어넘어 국빈 대접을 받고 있다. IOC 위원은 200여 회원국을 비자 없이 자유로이 출입국할 수 있으며 각국 국가원수 면담 권한도 주어진다. IOC 위원이 투숙하는 호텔에는 모국 국기가 게양되며 총회 참석할 때는 IOC에서 차량과 전담 통역사, 안내요원 등을 배정해준다.
IOC 위원은 총 115명으로 개인 자격이 70명, 국가올림픽위원회(NOC) 대표, 종목별 국제연맹(IF) 대표, 선수 위원 등이 각각 15명씩이다. IOC 위원의 임기는 8년으로 선수 위원은 단임이지만 개인 자격, NOC와 IF 대표 자격 위원은 1회 이상 임기를 연장할 수 있다. 정년은 1999년 이전 선출된 위원은 80세, 그 이후 뽑힌 위원은 70세다.
전동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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