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간 종로 귀금속 업계를 누비며 수출용 금괴를 불법 밀매해 온 60대 유통업자가 적발됐다. 밀매 규모만 무려 800억원에 달했다. |
금 유통업자인 이 씨는 20년 전에 전국의 뛰고 난다는 장사꾼들이 다 모인다는 종로 귀금속업계에 뛰어들었다. 업계에서 일명 ‘나까마 상’으로 통하는 소규모 도매업으로 시작한 이 씨의 사업은 해가 지날수록 일취월장했다. 치열하기로 유명한 그 바닥에서 여성 홀몸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씨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과 사별했을 당시 그의 뱃속에는 이미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이 씨는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만큼 삶은 더 치열했다. 종로 생활 20년 동안 그는 특유의 사업수완과 남성 못지않은 배짱으로 ‘여걸’로 통했다.
대규모 금 유통업자로 성장한 이 씨는 점점 욕심이 생겼다. 업계에서 ‘금 밥’을 먹은 지 20년 동안 그는 금 수출입과 유통에 관한 관세 및 회계처리 지식에도 정통해졌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에 따르면 이 씨의 관세 및 탈세수법에 관한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20년간 바닥에서 익힌 지식수준은 회계사나 관세사 뺨친다는 것이었다.
이 씨는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업계 지식을 총동원해 불법 밀매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지난 2004년부터 면세가가 적용되는 수출용 금괴를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들인 면세가 수출용 금괴는 불법루트를 통해 국내에 밀매했다. 면세가가 적용되는 수출용 금괴를 국내에 밀매하는 것은 탈세행위에 해당하는 엄연한 범죄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씨는 상당기간 동안 적발되지 않고 불법밀매를 진행할 수 있었을까.
정상적인 금괴 가공 및 수출 과정은 불법거래를 걸러내기 위해 꽤나 복잡하다. 우선 금괴 가공 수출업자는 한국귀금속가공협회에 면세가 수출용 금괴 추천 사실증명서를 발급받아 관할세무서에 제출한다. 세무서는 협회로부터 발급받은 사실증명서를 검토하고 업자에게 면세가 수출용 금괴를 구입해도 좋다는 추천승인서를 발급한다. 업자는 세무서에서 발급받은 추천승인서와 함께 금괴 매입금을 주거래은행에 예치한다. 은행은 금괴 가공 독점사업체인 ‘고려아연’에 업자로부터 받은 매입금을 전달한다. 매입금을 전달받은 고려아연은 업자에게 면세가 수출용 금괴를 넘기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매입한 수출용 금괴는 반드시 수출용 금 가공품 제조에만 쓰여야 한다. 업자는 수출용 금괴를 매입할 때 반드시 향후 수출내역을 알려야한다.
이 씨는 자신의 아들과 여동생 등 친인척 및 지인들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6개의 법인을 설립했다. 이렇게 설립된 법인을 통해 이 씨는 앞서 설명한 과정을 거쳐 수출용 금괴 대량 매입에 나섰다. 그는 관계기관의 부실한 감시시스템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갔다. 수출용 금괴를 매입하면 향후 반드시 수출내역을 알려야 하는데 여기서 일종의 속임수를 쓴 것이다.
이 씨는 금 가공품 대신 구리가공품을 그 분량에 맞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일본의 유령회사에 구리가공품을 수출했다. 서류상으로는 구리가 아닌 실제 금 가공품으로 되어 있었고, 금 가공품 가격과 맞춘 허위 현금거래 서류도 만들었다. 세관은 구리제품을 금 가공품인 양 쇼를 벌인 이 씨의 속임수에 허무하게 당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모은 금괴들을 국내 도매업자에게 몰래 팔아넘겼다. 수출용 금괴는 부가세가 면제되기 때문에 일반금괴보다 13%나 저렴하다. 또 수출용 금괴를 구입하면 구입금액의 3%에 해당하는 관세를 환급받을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괜찮은 장사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수법으로 이 씨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800억 원가량의 금괴를 매입해 무려 75억 원의 부가세와 12억 원의 관세를 포함, 총 87억 원의 조세를 포탈하게 된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아무리 철저한 방법을 썼다 해도 문제는 결국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와 바지사장은 명의대여 대가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돈’ 문제가 얽히면서 이 씨의 불법행위는 외부로 불거져 나왔고 우연히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기자와 만난 담당 수사관은 이번 사건을 두고 이 씨의 치밀한 밀매수법에 혀를 내둘렀다. 경찰은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종로 귀금속업계에서 횡행한 불투명한 금괴거래와 맹목적인 수출장려정책에서 비롯된 관계기관의 부실한 감시시스템을 꼽았다. 경찰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이 씨 외에도 업계 내부에서 각종 탈세 수법을 동원해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세력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전에도 바지사장들을 동원해 금 밀매에 나서는 사례는 있었지만 이 씨의 경우처럼 ‘전주’를 잡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대부분 고용된 바지사장들은 대가를 받고 딱 잡아떼기 일쑤기 때문이다.
현재 사건은 해결됐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아있다. 혈혈단신 여성업자가 800억 원대의 자금을 혼자 마련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따라서 경찰은 이 씨 뒤에 진짜 ‘전주’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일당들을 집중 추궁하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정관계 인사에 금 뿌렸나
검찰은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이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금괴 로비에 나선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은 이미 2007년, 유력인사들에게 골드바를 줬다는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은 바 있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잊힐 듯했던 신 회장의 ‘금괴 로비’ 의혹이 이번 금괴밀매 사건이 터지면서 재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신 회장은 지난 2007년, 이 씨와 유사한 수법으로 바지사장들의 ‘폭탄회사’(차명 법인)를 내세워 불법밀매에 나서다 검찰에 적발됐다. 당시 동원된 폭탄회사만 30개에 달했고, 1500억 원가량의 부가세를 탈루하며 막대한 차익을 챙겼다. 당시 검찰은 조사과정에서 신 회장의 ‘금괴로비’ 진술을 확보했지만 대가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해 결국 수사를 확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삼화저축은행의 정·관계로비의혹이 확대되면서 다시금 ‘금 선물’ 진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는 신 회장이 불법밀매를 하던 당시 남아있던 금괴를 정관계 로비용으로 사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