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은행이 발표한 경영 실적이나, 임원인사 때문에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려 2년이 넘도록 사용해왔던 ‘우리’라는 명칭을 두고 우리은행을 제외한 시중은행들이 우리은행측에 “이름을 바꾸라”고 주장하고 나선 때문이다.
지난 1월 말 신한, 조흥, 국민, 외환 등 시중은행들은 우리은행에 ‘우리은행’이라는 상호를 바꿀 것을 요청했다. 우리은행으로선 경천동지할 노릇.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은행에 들어간 ‘우리’라는 단어 때문에 여타 시중은행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고객에게 은행상품을 설명하거나, 은행 내부 회의를 할 때 ‘우리 은행에서는’이라는 표현을 할 때마다 혼동돼 불편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중은행들이 이런 불편을 겪어온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우리’라는 명칭으로 인한 혼선을 줄이기 위해 영어로 회의를 하는 일이 잦아질 정도였다니 말이다.
실제로 국민은행 관계자는 “‘우리’라는 단어가 ‘당행(Our bank)’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진짜 ‘우리은행’을 말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 아예 이와 관련해서는 영어를 사용했다”고 전했다.
‘우리 신한은행’, ‘우리 국민은행’ 이라는 표현도 써봤지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런 불편함이 계속돼다보니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문제를 촉발시킨 우리은행에 명칭 개정을 요구하게 됐다는 것이 시중은행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은행측은 어이없다는 반응. 이미 수년 전에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밟아 사용하고 있는 이름에 대해 경쟁 은행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일부 은행이 내부적 불편함을 이유로 들어 경쟁은행의 상호를 문제 삼고 나선 것은 상도의에 어긋나는 행동 아니냐”며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여러 시중은행들이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향후 이 문제는 법정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하필이면 지금 이 문제가 터져 나왔느냐는 점.
우리은행이 이 상호를 사용한 지는 이미 2년 반이 넘었다. 지난 2002년 5월, 당시 한빛은행은 지주회사였던 우리금융지주회사와 CI를 통일하기 위해 상호를 한빛은행에서 우리은행으로 바꿨다. 따라서 다른 시중은행들이 명칭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다.
우리은행측이 10개가 넘는 경쟁은행들의 이번 이의 제기에 강력히 맞서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갑자기 은행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배경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해석인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한 등 경쟁은행들은 두 가지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첫째는 시간이 지날수록 명칭으로 인한 불편함이 더욱 커져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지경에 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라는 명칭에 대해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을 최근에야 찾았다는 것이 이들이 주장하는 진짜 이유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법적인 방법으로 맞설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지난 연말 법무법인 화우로부터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얘기에 따르면 그동안은 법적인 하자를 찾지 못해 속앓이만 해왔는데,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들 시중은행들이 법적 하자라고 내세우는 방법은 상당히 복잡하다. ‘상호’와 ‘상표’에 대한 차이점을 명확히 해 우리은행을 압박하겠다는 것.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행법상 ‘상호’와 ‘상표’는 적용되는 법률이 다르다고 한다. ‘상호’의 경우는 적합한 법적인 절차를 통해 등록이 허가될 경우 다시 변경하기가 힘들지만, ‘상표’의 경우는 다른 제품(명칭)과 유사하면 변경을 하도록 되어있다는 것. 시중은행들은 이런 미묘한 어의(語意)상의 차이를 활용해 우리은행의 상호와 상표에 대해 제재 조치를 가한다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문제는 법정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중은행들이 최근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사실상 이번 일은 신한 대 우리은행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시각이 바로 그 것이다.
국내 제1금융권은 시티은행(한미은행 인수), HSBC(제일은행 인수), 론스타(외환은행 인수) 등 외국계 자본들이 대거 입성한 가운데, 순수 토종자본으로 운영되는 시중은행들의 위기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중에서도 핫 이슈는 신한-조흥이 합병을 마칠 경우, 2위로 도약할 수 있느냐는 부분. 국민은행이 부동의 1위를 유지한 가운데, 2위 자리를 두고 우리은행(현재 2위)과 신한-조흥은행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바로 이 전쟁의 전초전으로 신한-조흥이 우리은행의 명칭에 대해 딴죽을 걸고 나선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바로 그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이 모두 우리은행에 대해 협공을 벌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신한은행이 주도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며 “우리은행과의 본격적 승부를 앞두고 전초전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한은행 관계자는 “세력 다툼을 위해 법적 소송을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우리은행이 향후 상호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지, 아니면 새로운 이름을 찾아야 할 지는 법정에서 가려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