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돈·시간 투자 상상초월, 프로 데뷔 후엔 ‘감정노동’까지…아빠도 길잡이, 코치, 경호원, 심리상담사까지 해야
어린 아들이 "야구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부모는 엄청난 유·무형적 투자를 각오하고 또 감수할 준비를 한다. 앞으로 아들을 위해 돈과 시간을 모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걸 알아서다. 학창시절에는 아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라운드 밖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꼼꼼하게 챙긴다. 아들이 성인이 되고 프로 구단에 입단한 뒤에는 매일 성적에 따라 울고 웃어야 하는 '감정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고생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들이 프로에서 성공해 억대 연봉을 받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2군을 전전하다 방출이라도 당하는 날엔 그간의 투자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고 미래마저 불투명해진다. 무엇보다 선수들 대부분은 둘 중 후자의 사례로 남을 확률이 훨씬 더 크다. 야구선수 부모의 삶은 이렇게 위기와 고비로 점철돼 있다.
#야구는 '비싼' 운동이다
현실적으로는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부담이다. 대부분 학교는 야구부를 위해 큰돈을 투자할 수 없다. 감독과 코치들의 월급, 기본적인 야구 장비, 운동장 제공 등 팀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지원한다. 나머지 비용은 다 학부모들이 알음알음 부담한다. 아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중·고교 야구부가 매달 100만 원 안팎의 회비를 낸다. 식비 범위나 숙소 생활 여부에 따라 그 금액이 더 많아지기도 한다. 평균을 100만 원으로 잡아도 중·고등학교 6년간 총 7200만 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형편이 좋지 않은 부모에게는 실로 엄청난 돈이다.
실제로 야구부 회비 때문에 학창 시절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선수들도 많다. 적지 않은 선수가 야구를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집에 돈이 없어 야구부 회비를 내지 못했을 때'를 꼽곤 한다. 부모가 지방에서 수산업을 하던 A 선수는 현 소속팀에 신인 2차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을 받을 만큼 실력이 뛰어났지만, 고교 때 회비를 체납했다는 이유로 야구부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그는 "어린 마음에 왜 갑자기 운동을 쉬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나중에 진짜 이유를 알고 나서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아버지가 IMF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었던 B 선수도 학창 시절 회비를 채우지 못해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했던 B 선수의 어머니는 "우리 대신 고모가 몇 번 회비를 내줘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고모가 아들을 함께 키운 셈"이라며 고마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A와 B는 프로에서 주전 선수로 성장해 억대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처럼 성공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이 회비는 고스란히 부모의 빚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뿐 아니다. 아들이 경기하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부모가 수술비와 치료비를 내야 한다. 팀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거나 4강에 들면, 부모들이 수십만 원씩 모아 코칭스태프 보너스를 주기도 한다. 지금은 코로나19 여파로 불가능해졌지만, 해외 전지훈련을 가게 되면 항공료와 숙박비도 모두 부모들이 냈다. 전국대회에 참가할 때 버스를 대절해 이동하고 대회 장소에서 숙박하는 비용도 물론 부모의 몫이다. "우승한 뒤 기뻐하는 아들을 보고 벅찬 마음이 들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우울했다"는 어느 야구 선수 어머니의 토로에는 일리가 있다.
사교육, 이른바 '과외 수업'에 대한 부담도 점점 더 커진다. 은퇴한 프로 선수들에게 개별 레슨을 받는 학생 선수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선생님'이 프로에서 제법 준수한 경력을 갖고 있다면, 시간당 레슨비가 10만 원 안팎으로 치솟는다.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나서야 하는 고교 3학년이 되면 아예 프로 출신 트레이닝 코치가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몸관리를 따로 받는 선수도 있다.
그래도 부모는 아들이 야구를 못해 벤치를 지키거나 프로 지명을 못 받는 모습을 보느니, 빚을 내서라도 최대한 돈과 열정을 쏟아 붓는 쪽을 택한다.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다"는 박탈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더 그렇다. 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C 선수의 어머니는 "남들은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했던 야구를 우리 아들은 늦게 시작했다. 따로 개인지도를 받아서라도 따라잡을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이런 부모의 간절함을 악용하는 인물들도 있다. 은퇴한 한 프로야구인은 "투수 과외를 해주겠다"면서 1년에 수천만 원의 레슨비를 요구해 물의를 일으켰다.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내야수로 뛰었던 이여상(이로운으로 개명)은 자신이 운영하는 야구 클리닉에서 유소년과 학생 선수들에게 금지 약물을 권유하고 투여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
프로야구 선수는 몸이 가장 큰 재산이다. 어릴 때는 제법 체격이 좋아 운동을 시작했는데, 성장하면서 키가 자라지 않으면 부모의 속은 타들어간다. 정근우(은퇴), 이용규(키움 히어로즈), 김선빈(KIA 타이거즈), 김지찬(삼성 라이온즈)처럼 체격이 작은 선수들에게도 틈새시장이 열려 있지만, 신체조건은 여전히 선수를 뽑을 때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 중 하나다. 특히 투수는 무조건 키가 커야 유리하다.
데뷔 후 팀에서 붙박이 선발로 뛰어온 D 투수는 "집이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학창시절 너무 마른 몸 때문에 부모님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몸에 좋은 음식을 늘 사다 먹이시는 건 기본이고 전국의 용하다는 한약과 양약은 웬만하면 다 먹어봤다"고 했다.
베테랑인 D 투수는 뱀탕이나 녹용, 흑염소, 붕어즙 같은 전통의 보신 식품을 먹어 본 세대에 속한다. D 투수는 "부모님이 뱀값으로만 한 달 생활비 이상을 쓰셨던 적도 있는 것 같다. 야구부 회비도 돈이 만만치 않았지만, 운동은 몸으로 하는 거라 몸을 위한 보약이나 음식값으로도 지출이 많으셨다"고 떠올렸다.
반면 요즘 부모들은 학생 선수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희귀 보양식 대신 소고기, 장어, 삼계탕, 낙지, 홍삼 등을 양껏 먹이느라 돈을 많이 쓴다. 또 식사를 준비할 땐 탄수화물·단백질·지방을 골고루 배분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력이 떨어지는 여름엔 한의원에서 공진단 등 값비싼 보약도 지어다 준다. 이런 몸 관리는 학생 때는 물론이고, 프로 선수가 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돈을 쏟아 붓는 것은 야구 선수 뒷바라지의 지극히 일부분이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들이 더 많다. 야구부 합숙소의 생활을 책임지는 건 기본. 야구부 숙소 청소부터 빨래, 저녁식사 담당까지 모두 부모들이 해왔다. 경기를 치를 때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같은 야구부원들의 식사와 잠자리까지 챙겨야 한다. 야구부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일이라 빠지기도 어렵다. 부모들 전체가 아이들이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새다.
고교 시절부터 에이스로 활약했던 E 선수의 어머니는 "야구부 학부모회 총무여서 매일같이 아들은 물론이고, 같은 야구부원들 밥까지 챙겨 먹였다. 삼겹살 회식이라도 할 때면 한창 먹성 좋은 야구부원들 고기 수십 인분을 직접 굽고 뒤집느라 팔 근육이 마비되기 일쑤였다"고 귀띔한 적도 있다.
심지어 학부모들 사이에도 아들의 학년과 실력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생긴다. 갓 입학한 1학년 학생이 3학년들을 제치고 게임에 나서기라도 하면 곧바로 시기와 의혹의 시선이 쏟아지기도 한다. 야구를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고달픈 일상의 연속이다.
물론 이보다 더 안타까운 순간은 다른 자녀들의 원망을 들어야 할 때다. 부모가 한 명의 아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동안, 또 다른 아들이나 딸은 상대적으로 소외되기 마련이다. 늘 위축돼 있거나, 반항심에 엇나가는 일도 종종 생긴다. 프로야구 선수들 대부분이 부모 외에도 형과 누나, 동생의 희생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다.
이 때문에 과거 두 차례 자유계약(FA)으로 큰 성공을 거둔 F 선수는 남몰래 극진한 동생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생의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를 모두 부담한 것은 물론, FA 계약 직후 새 소속팀 연고지로 이사하면서 원래 자신이 살던 30평대 아파트를 동생에게 양도했다. E 선수는 "동생이 나 때문에 사춘기 시절 부모님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한 것 같아 늘 미안했다. 다행히 형을 원망하지 않고 잘 자라준 게 고마웠다.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엄마'만큼 중요한 '아빠'의 역할
아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세세한 부분을 챙기는 사람은 주로 어머니다.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어머니는 아들의 야구부 생활과 식사 등을 뒷바라지하는 게 아직까지는 야구선수 아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전형적인 역할 분담이다. 야구부원의 아버지들보다 어머니들 간의 의사소통과 협업이 더 활발하게 이뤄지기에 더 그렇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역할이 '경제적 지원'에 한정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성공한 야구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길잡이이자 정신적 지주를 넘어 코치와 경호원, 심리상담사까지 두루 해낸다. 자칫 아들이 그릇된 유혹에 빠져 야구와 멀어질 때면, 단호하게 회초리를 들어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역할도 담당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메이저리그(MLB)에서 뛰는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아버지 류재천 씨다. 류 씨는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자 일단 왼손잡이용 글러브부터 사줬다. 아들은 오른손잡이였지만, 왼손 투수로 성장한다면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류현진은 실제로 세계 최고의 무대를 주름잡는 '좌투우타' 선수로 자라났다.
류 씨는 또 집 마당에 개인훈련용 그물망을 설치했고, 옥상에는 야간훈련을 위해 라이트를 달았다. 담력을 키우기 위해 인천 월미도의 바이킹과 새벽의 부평 공동묘지도 자주 찾았다. 이뿐 아니다. 마당의 배나무에 고무줄을 묶어놓고 수시로 어깨 강화를 위한 튜빙을 시켰다. 당시 한 스타플레이어의 아버지가 어릴 때 탁구공으로 토스배팅을 시켰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는 집 근처 골프연습장에서 폐공을 모아와 똑같은 훈련을 시켰다.
동시에 '야구 신동'인 아들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과 열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류현진은 동산고 2학년 때 팔꿈치 수술을 받아 1년간 재활했는데, 류 씨는 그 기간에도 동산고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에 무조건 아들을 데리고 갔다. 팀에 대한 소속감과 복귀 의지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에서다.
KBO리그에 통산 2000안타 시대를 연 양준혁의 아버지 양철식 씨는 어린 시절 아들의 심장을 고친 정성으로 유명하다. 양준혁은 중학교 시절 심장병을 앓았다. 의사는 "고치기 어렵다"고 했고, 주변에서도 '야구를 하면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그만두는 게 낫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전국을 돌며 심장병에 좋다는 약을 수소문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한 한약을 구했다. 양준혁은 "그 약을 먹고 심장병이 나아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한국 야구 역대 최고 타자인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는 아들이 야구에 입문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 단식투쟁까지 불사한 어린 아들의 집념에 두 손을 든 케이스다. 이 씨는 이후 학창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낸 아들에게 절대 "잘한다, 네가 최고다"라는 칭찬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아들을 잔뜩 치켜세우면서 키우는 부모를 많이 봤지만, 그들 중 성공한 선수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오히려 아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자만하지 말라'고 주문하면서 "그래야 너도 살고 팀도 산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또 '이승엽의 아버지'로 살기 위해 "아버지 역시 프로선수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철학을 품었다. 아들이 잘해도 삼성이 지면 기뻐하지 않았고, 반대로 아들이 못해도 삼성이 이기면 박수를 보냈다. 또 아들이 슬럼프에 빠져 너무 깊이 고민할 때는 "야구 생각만 하지 말고 좀 놀기도 하라"고 먼저 등을 떠밀기도 했다.
KBO리그 간판타자 중 한 명이었던 김태균은 아버지 김종대 씨의 선견지명 덕에 야구선수가 됐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교실로 찾아와 나를 교장실로 데리고 가셨다. 교장선생님이 내 손을 보시더니 '선동열 같은 선수가 되어라'라며 바로 전학을 승인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김태균은 야구부가 있는 천안 남산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이후 김 씨는 아들에게 "너는 분명 야구선수로 성공할 것"이라며 끊임없이 확신을 불어넣었다. 중학교 때는 아들의 훈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동네 공터에 직접 비닐하우스를 지었고, 휴일마다 함께 그 공간을 찾아 훈련 파트너 역할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되는 개인 훈련에 김태균이 힘들어 할 때면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고 다독였다. 김태균은 "그 말씀이 내 인생의 모토가 됐다"고 했다.
아들이 선수 생활 내내 사용한 등번호 52번도 북일고에 진학할 때 아버지가 직접 골라준 숫자다. "52라는 숫자의 형태가 한쪽으로 좋은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결국 그 번호는 영원히 '김태균의 번호'가 됐다. 그는 52번을 한화에 영구결번으로 남겨놓고 은퇴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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