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국토해양위원회에서 LH 진주 일괄 이전과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이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4·27 재보선이 끝난 후 여권 핵심부에서는 ‘매시’라는 말이 조용하게 퍼져나갔다. 매시는 ‘매 맞는 시기’와 ‘매듭짓는 시기’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긴 줄임말. 이명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국정운영에 부담을 줄 수 있는 대형 국책사업 선정을 5월 중에 마무리 지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비난을 한꺼번에 감수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라면서 “차라리 이럴 바엔 논의를 빨리 끝내고 한미 FTA와 4대강 사업과 같은 핵심현안들을 집중 추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시’는 청와대 몇몇 인사들이 언급한 ‘5중털’과도 일맥상통한다. 5중털은 ‘5월 중순까지 털기’의 줄임말로, 그동안 지지부진한 논의만 거듭했던 LH 이전과 과학벨트 입지 선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우선 이명박 정부는 5월 13일 LH 본사를 경남 진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2009년 10월 출범 이후 본사 이전을 놓고 진주와 전주가 첨예하게 격돌해왔는데, 결국 진주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신 진주로 옮기려던 국민연금관리공단을 전주에 배치하기로 했다. 3일 뒤인 16일엔 과학벨트 핵심인 기초과학연구원 본원과 중이온가속기가 들어설 거점지구로 대전 대덕지구를 선정했다. 주무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2017년까지 과학벨트에 총 5조 2000억 원이 투자될 예정인데 이는 2009년 수립된 종합계획에서 제시된 3조 5000억 원보다 1조 7000억 원 늘어난 규모. 증액 예산 대부분은 선정과정에서 탈락한 광주와 경북 지역에 배정될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에서 이번 과학벨트 선정에 대해 ‘나눠먹기’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LH 본사와 과학벨트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가 고배를 마신 해당 지역에서는 이번 정부의 결정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완주 전북도지사는 청와대 앞에서 규탄대회를 갖고 “LH뿐만이 아니라 200만 전북도민과 300만 전북향우가 목숨처럼 생각하는 자존심마저 잃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도 “(LH의) 진주 배치는 또 한 번 이명박 정권이 국민을 속이는 것으로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벨트 거점지구 후보지였던 경북과 광주 역시 빠른 속도로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18일 한 회의석상에서 “야당 때는 찬밥신세였고 여당 되고 나니 참으라는 것에 대해 시도민은 우려와 걱정 속에 분노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도 과학벨트 선정 기준이 불합리하다며 단식 농성을 벌이다 지난 17일 입원했다. 현재 경북도는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광주 서구 을 출신인 김영진 민주당 의원도 과학벨트 거점지구 선정과 관련 “졸속으로 이뤄졌다. 검증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간 상태다.
이처럼 지역 여론이 들끓자 여권 내에서도 이를 우려하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잠깐 매를 맞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 역시 “내년 총선과 대선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대통령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다. 당과 청 모두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얼마 전 이상득 의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등 정권 실세들이 단식을 하다 입원한 김관용 경북도지사 병실을 방문한 것도 ‘민심 달래기’의 일환으로 풀이되고 있다. 김황식 총리도 지난 16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통해 “이번 결과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오로지 국가 미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만큼 국민 여러분께서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여권 내에서는 정부의 그 어떤 수습책도 성난 지역 민심을 잠재우지 못할 것이란 ‘비관론’이 팽배한 모습이다. 선정 과정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탈락 지역이 끝까지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정훈 한나라당 의원은 “정부의 평가를 아무도 믿지 않고 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하면 나라가 절단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실 관계자는 “영남권 현역 의원들 사이에서 내년 총선에 대한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결정을 번복하라는 게 아니다. 다만 선정 과정을 투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우여 신임 원내대표 역시 “최근 정부의 국책사업 선정으로 지역갈등이 과열 양상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결정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당에서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 차원에서 LH본사 이전과 과학벨트 선정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가능성을 시사한 대목이다.
특히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 이재오 특임장관계 일각에서 이상득 의원의 ‘책임론’을 거론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 의원과 몇몇 측근들이 결정 과정에 개입, 영향력을 행사해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수도권 출신의 한 소장파 의원은 “발표 시기 조정, 예산 안배 등을 살펴봤을 때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면서 “몇몇 위원회 관계자들로부터 이 의원 측근이 관여했다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보 받았다”고 전했다. 소장파 관계자들에 따르면 LH 이전과 과학벨트 선정은 주무부처 및 관련 위원회 논의를 거쳐 확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몇몇 인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됐다고 한다. 여기서 소장파가 지목하고 있는 ‘SD 라인’은 이 의원을 포함해 J·K 의원, 정부 장·차관급 인사 Y·P 씨 등이다.
소장파 등은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해야 할 위원들이 정권 실세로 불리는 ‘형님 세력’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해 사실상 ‘거수기’ 노릇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의 소장파 의원은 “이미 정해진 결론대로 짜 맞추기 위해 애를 쓴 공은 인정한다”고 비꼰 뒤 “그러나 국가 백년대계가 걸려 있는 대형 사업들을 특정 세력이 주도하도록 묵인한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장파 일각에선 이번 국책사업 결정을 앞두고 이 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의 ‘동의’를 미리 구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박 전 대표와의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의원 측이 지난 3월 신공항 백지화 발표 당시 친박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이번엔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재오계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이번 선정 과정은 ‘형님 세력이 기안을 작성해 박 전 대표로부터 중간 결재를 받은 후 이 대통령에게 최종안을 올렸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이 의원 측은 “억측일 뿐,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하고 있다. 소장파와 이재오계가 파워게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신들을 모함하고 있다며 억울해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처럼 LH 이전과 과학벨트 선정을 놓고 여권 각 계파 간 힘겨루기 양상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요신문>은 관련 위원회 관계자들을 접촉해 이번 결정이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추론할 수 있는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LH 이전을 최종 결정하는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계속 미뤄져오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논의에 속도가 붙었다. 일사천리로 모든 것이 진행돼 위원들 대부분이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사실상 (진주로) 결정된 듯한 분위기 속에서 논의가 진행됐다. 이번엔 꼭 성사시켜야 된다는 압박이 안팎에서 제기됐는데,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좀 더 차분하게 살펴봤어야 한다는 견해들이 지금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벨트 입지선정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나중에 언론을 통해 입지 점수가 공개됐을 때 약간 의아했다. 실무 단계에서 매겼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럴 리 없겠지만 여러 곳에서 의혹이 나오고 있는 만큼 (점수) 조작 여부를 검증할 필요는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국정조사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LH 이전 및 과학벨트 선정 논란의 후폭풍이 과연 여권지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