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회 비토로 ‘인권 앞장’ 여준형 임명 무산설…내부 반문정서 커지고 있다는 얘기도
10월 21일 대한빙상경기연맹(빙상연맹)이 심석희를 둘러싼 모바일 메신저 폭언 파문과 관련한 조사위원회 구성을 완료했다. ‘특수통’ 검사 출신 양부남 빙상연맹 부회장이 조사위원장을 맡았다(관련기사 [단독] ‘특수통’ 양부남 부회장, 심석희 파문 진상조사위원장 낙점). 위원으로는 신상철 경기도빙상연맹 회장, 고기현 평창 유스올림픽 집행위원, 최용구 빙상연맹 심판이사, 김경현 변호사, 최종덕 대한체육회 청렴시민감사관 단장, 김희진 인권침해예방활동연구소 대표 등 6명을 선임했다.
그런데 조사위원회 구성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위원 선임을 놓고 정부와 대한체육회 사이 치열한 파워게임이 펼쳐졌다는 게 골자다. 여권에서도 특정 인물을 위원으로 추천했지만, 대한체육회 비토기류가 심해 무산됐다고 한다.
여권 일각에서 조사위원으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특정 인물'은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로 알려졌다. 여 대표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전후로 불거진 빙상계 각종 논란, 2019년 1월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의 성폭행 피해 사실로 드러난 빙상 및 체육계 내부 병폐에 대해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체육계에서 인권 관련 이슈에서 목소리를 낸 인사다.
체육계와 빙상계에서 여준형 대표는 공공연한 ‘기피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체육계 내부 인권에 대해 서슴없이 쓴소리를 하는 까닭이다. 여 대표는 2020년 11월 제너시스 BBQ가 빙상연맹 새로운 회장사로 들어선 뒤 임원진을 구성할 때도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없던 일이 됐다.
2020년 12월엔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감독 공채에 응시했다. 여 대표와 또 다른 국가대표 코치 출신 지도자 등 2명이 공채에 지원했다. 여기서 빙상연맹은 올림픽 시즌에 쇼트트랙 국가대표 감독직을 공석으로 남기는 강수를 뒀다. 여 대표의 빙상 제도권 진입은 번번이 실패했다.
복수의 빙상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빙상연맹은 여 대표가 감독직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국가대표 코치 재직 시절 선수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음주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경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일요신문이 취재한 빙상연맹 내부 자료엔 여 대표에 대한 징계 이력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돼 의문점이 남는다.
이번 ‘심석희 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는 상황에서 여 대표 이름이 다시 거론됐다. 빙상연맹이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에 착수하면서 정부 측 복수 관계자가 여 대표를 추천했다고 알려지면서다. 여권 한 관계자는 "여 대표는 엘리트 체육인 출신으로 현행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 비판적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인사라 판단돼 이번 조사위원회 구성 과정에서 추천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 내부에서 여 대표에 대한 비토 기류가 심했다는 후문이다. 한 문체부 고위 관계자가 여 대표를 거론하며 “대한체육회가 이렇게 누군가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성토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한 빙상계 인사 주장에 따르면 대한체육회 지도부 내부에선 여 대표의 정치적 성향을 거론하며 ‘그 사람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만약 이번 빙상연맹 조사위원회에 여준형 대표가 들어갈 경우 일이 커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리스크가 존재한다”면서 “조사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조사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인데, 대한체육회나 빙상연맹은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이라는 중요한 이벤트를 앞두고 최대한 조사 범위를 줄이고 싶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빙상 관계자는 “올림픽을 앞두고 심석희와 조재범, C 코치 등에 대한 표면적인 조사를 통해 당사자들에 대한 징계를 하느냐, 아니면 시스템적으로 곪아있는 빙상계 내부 병폐를 들추느냐에 따라 조사 대상이나 양상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결국 2022 동계올림픽 경기력에 초점을 맞추느냐, 체육계 고질적 병폐를 깊숙이 파헤치느냐의 차이”라고 덧붙였다.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10월 21일 통화에서 “내가 심석희 진상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추천됐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면서 “내가 조사위원이 되는지 안 되는지엔 애초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조사위원회가 궁극적으로 사건의 표면보다 빙상계 고질적 병폐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외부에서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대한체육회 수장인 이기흥 회장과 빙상의 연결고리도 재조명되고 있다. 이 회장은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중 전명규 당시 빙상연맹 부회장, 심석희와 동석한 자리에서 “조재범 코치 문제는 내가 해결해줄게. 잠잠해지면 돌아오게 해줄게”라고 발언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전력이 있다.
‘조재범을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취지로 발언한 지 3년 뒤인 2021년 1월, 이 회장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종걸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민주당 4선 출신’ 유준상 전 의원을 꺾었다. 첫 임기 중 스포츠계 미투 파문, 고 최숙현 선수의 극단적 선택, 각종 갑질 논란 등 악재로 중도하차까지 제기됐던 이 회장은 오뚝이처럼 일어나 재선을 일궈냈다.
일각에선 진상조사위원 구성을 놓고 벌어진 파워게임 이면엔 이러한 배경이 얽혀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권 또 다른 관계자는 “2021년 1월 대한체육회장 선거전은 이 회장과 여권 정치인 출신 인사들 사이에 맞고발전이 펼쳐질 정도로 치열했다”면서 “여기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에 접어든 타이밍이 맞물리면서 대한체육회 내부에 반문정서가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한 체육계 인사는 “이번 정부와 체육회 사이 파워게임엔 공존이 어려운 가치관들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 이 인사는 “엘리트 체육의 발전과 스포츠 인권 향상이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원하는 조사 방향과 대한체육회가 원하는 방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한체육회와 빙상연맹의 경우엔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단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빠르고 간결한 조사를 원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쪽은 현 정부가 강조해온 스포츠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방식을 원한다. 그 과정에서 파워게임이 펼쳐졌고, 대한체육회가 ‘정치와 스포츠의 분리’라는 명분 아래 승기를 잡은 모양새가 됐다.”
한편, 10월 12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국회에서 열린 문체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심석희 고의충돌 논란’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이 회장은 “우리 선수들이 고의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충돌행위에 대한 확인이 먼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이 회장은 조사 결과에 따라 심석희 국가대표 자격과 관련한 조치가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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