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반칙왕>의 한 장면. |
상사에게 찍히면 일단 가장 큰 변화는 몸이 힘들어진다. 끊임없이 달달 볶고 채근하는 상사로 돌변해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찾을 수가 없다.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 씨(30)는 부서 변경 전 주말도 없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었다고 털어놓았다. 입사 초기 업무상 크지 않은 실수를 몇 번 하자 부장의 눈 밖에 난 ○ 씨의 강행군이 시작됐다. 명분이야 업무를 빨리 배우게 해준다는 거였지만 실상은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부장한테 찍혀서 부서 바뀌기 전까지 1년 반을 매일 7시에 출근했어요. 회사가 집에서 멀지 않은데요, 아침 6시 반이면 집 앞에 부장이 차를 몰고 와서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먼저 요청한 적은 당연히 없고 본인이 언젠가부터 예고도 없이 와서 절 불러냈는데 그 다음부터 매일이었어요. 처음에는 며칠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부서 옮기기 전까지 매일을 그랬습니다. 진짜 독하다는 소리 나오던데요.”
○ 씨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따로 있었다. 그는 “일요일까지도 같은 시간에 부장이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며 “나중에는 자포자기해서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고 이야기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L 씨(32)도 상사 때문에 몸이 괴로운 경우다. 상사에게 밉보인 이후 살이 3㎏이나 빠졌다.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눈 게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직원들은 팀장한테 대체로 살랑살랑 합니다. 하지만 전 성격상 그런 걸 잘 못 하거든요. 남들과 다른 태도가 눈에 거슬렸는지 팀장이 대놓고 외근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다른 직원이 가야 할 것도 저보고 가라고 지시합니다. 군말 없이 가는데 문제는 반드시 외근 후 회사에 복귀하라는 거죠. 집에서 회사는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예요. 그런데 집 근처 현장에 갔다가 퇴근시간이 다 됐는데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퇴근하라고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현장퇴근을 하잖아요. 실제 부서 내 다른 직원들은 그런 편의를 봐주고 있고요. 이제 좀 지치는데 저도 팀장 앞에서 아양 좀 떨어야 하나 고민입니다.”
남들은 모르는 방법으로 교묘한 복수전을 펼치는 상사 때문에 괴로운 직장인들도 있다. 이벤트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28)는 상사에게 단단히 찍힌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성격 때문에 본부장에게 몇 번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눈 밖에 났다. 본부장은 평소 이야기할 때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데다 K 씨에게만 꼭 “○○씨”라고 부른단다.
“단단히 틀어졌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얼마 전 토요일 사건을 겪고 심각성을 깨달았어요. 토요일 퇴근 시간이 3시인데 그날 따라 일이 많아서 전 1시에 점심을 먹으려고 일어났죠. 다른 직원들은 먹고 들어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본부장한테만 살짝 말씀드리고 나갔는데요, 식사 후 돌아와 보니 사무실 불이 다 꺼져 있고 문이 잠겨 있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은 1시 30분쯤에 다 같이 일찍 퇴근하기로 되어 있었던 거예요. 본부장은 일부러 저한테 이야기를 안 했고, 밥 먹으러 갔다는 걸 다른 직원들한테 전달하지 않아 그냥 다들 퇴근한 겁니다. 달려가서 따지지도 못하고 그냥 눈치만 보게 되네요.”
중소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H 씨(32)도 상사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영업실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자주 야단을 치는데 영업이사는 다른 직원들에게는 H 씨가 싫어서가 아니라 채찍질해서 더 잘하게 하려는 거라고 이야기 한단다. 감정이 섞였다는 건 본인만 느낀다.
“입사한 지 3개월 이상이면 인센티브가 나옵니다. 원래 경력직으로 온 거라 바로 나와야 정상이지만 일단 그건 양보했습니다. 하지만 상사한테 밉보이니까 3개월이 지나도 인센티브가 안 나오네요. 저랑 비슷하게 들어온 신입 여직원은 인센티브가 들어왔는데 저는 없더라고요. 몇 십만 원, 이거 저한테는 크거든요. 영업이사가 인센티브 여부를 체크하는데 저만 쏙 빼놓은 겁니다. 직원들마다 매달 받는 액수가 다르고 급여와 관련된 거라 다른 직원들에게는 속 시원하게 물어볼 수도 없어서 끙끙 앓고 있습니다.”
상사라고 누구나 합리적이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때로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모습으로 부하직원을 못살게 군다. 무역회사에 분야를 바꿔서 이직한 J 씨(여·28)는 자신보다 어린 상사 때문에 요즘 죽을 맛이다.
“저보다 두 살 어리지만 연차로는 꽤 오래된 바로 위 사수가 있어요. 제가 입사해서 인수인계를 받다가 잘못 정리된 파일을 발견한 적이 있어요. ‘지적질’이 아니라 좀 이상해서 그 사수한테 이야기했는데 실수를 집어낸 걸로 오해한 거죠. 그 뒤부터 사무실 허드렛일만 시키고 할 일 없이 논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닙니다. 제 등 뒤에서 다른 상사랑 ‘쟤 잘리고 온 거 아냐’라는 말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며칠 전에는 서류 정리를 하다가 모르고 그 사수의 파일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바로 ‘아, 씨×’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순간 얼굴이 빨개져서 얼굴을 들지도 못했어요. 힘드네요, 정말.”
패션업체에 근무하는 S 씨(여·30)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여자 상사에게 황당한 이유로 찍혀서 회사 다니는 게 고역이다.
“지금 회사로 이직해 첫 출근했을 때 상사가 유난히 친근하게 굴면서 다가오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면서 함께 찜질방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상사인데 목욕을 같이 하는 게 얼마나 어색해요. 정중하게 거절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잡아두더군요. 주중에는 아예 사적인 약속을 못 잡게 해요. 자신도 그렇게 버티면서 잡아두는데 먼저 가겠다는 말도 못하죠. 할 일도 없는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덩그러니 둘만 있습니다. 요새 계속 이런 상태네요.”
상사에게 찍혔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꼽힌다. 본인이 출근했을 때만 시계를 보고, 인사를 받지 않고 변명이 통하지 않는 등 다양하다. 이럴 때는 맞서기보다 굽히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처세술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고 전략적으로 아부를 해야 앞날이 평탄하다는 것이다. 상사와의 트러블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