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로비파문을 겪으면서 DJ는 ‘힘의 정치’를 택하고, 천용택씨를 국정원장에 임명해 국내파트를 강화한다. | ||
그만큼 당시 DJ는 충격을 받았다. 옷로비 사건에 대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마녀사냥식 보도’라고까지 규정하면서 언론과 야당을 비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거기서 훨씬 더 나갔다.
DJ는 국정운영의 틀을 ‘강공체제’로 전환시켰다. 국가정보원의 국내정보 수집활동 강화, 호남인맥의 전면배치,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 추진, 재야인사들과의 독대정치 축소, 일부 언론사를 겨냥한 세무조사 등은 바로 옷로비 사건이 절정에 달한 직후 이뤄진다.
야당시절 지인 및 당 인사들과의 독대를 통해 조언 받기를 즐겼던 DJ가 변했다는 얘기가 이 시기를 전후로 무성해졌다. 옷로비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가 소수정권을 겨냥한 탄압이라고 여겼던 DJ가 ‘충언’이나 ‘고언’을 멀리하게 됐다는 해석이다.
거꾸로 “내 사람과 함께 간다”는 생각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대 멤버였던 재야인사들이 DJ의 변화를 감지, 만남 자체를 꺼리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제2건국위 기획단장이었던 김상근 목사는 집권 초부터 김 대통령을 주 1회 정도 면담해 민심을 전했던 인사. ‘직언파’로 소문나 있던 김 목사는 99년 6월쯤부터 미묘한 청와대 분위기를 느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 청와대 비서관들이 그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한 번은 김 대통령이 “주말에는 언제든지 와서 만나자”고 말했으나 김 목사는 “앞으로 보고서로 올리겠다”고 답하고 나왔다. 이때 수석비서관 K씨가 따라붙었다.
K씨가 “대통령이 무슨 말씀을 했느냐”고 물어서 “독대를 자주하자고 하셨으나 보고서를 올리겠다고 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이에 K씨는 “잘했다”며 희색을 띠었다. DJ가 마음의 문을 닫자 주변에서 ‘인의 장막’을 두텁게 쳤던 셈이다. 이후에도 김 목사는 몇몇 인사들과 김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으나 하고 싶은 말을 했던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청와대 만찬 등이 열리면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한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하는 것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분위기가 살벌하다. 입이 얼어서 안 떨어진다. 다만 이만섭 국민회의 총재만 쉽게 말을 하는 것 같다.”
DJ는 옷로비 파문의 와중에서 단행한 99년 5월24일 개각을 통해 통치철학의 변화를 행동으로 옮긴다. 이종찬 국정원장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천용택 국민회의 의원을 임명한 것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
당시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DJ는) 이종찬씨가 국정원을 망쳐놨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국정원을 개방하고 대 국민서비스 기관으로 만든다고 하면서 정보수집이 잘 안됐다. (그래서) 천용택 원장은 국정원을 옛날 체제로 되돌리고 있다. 북풍 사건으로 약화된 대북파트뿐만 아니라 국내파트 중에서도 정치, 언론 부분 등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천 원장은 국정원의 정치파트 인력을 과거 규모로 원상회복시켰다. 이종찬 원장 시절에 중단됐던 정치사찰도 ‘체제수호 차원의 정보수집’이라는 명분 아래 사실상 재개됐다.
엄익준씨가 국내담당 2차장에 기용된 것은 국정원의 성격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엄씨는 97년 대선 때 DJ를 도왔던 인물. 대선 승리 직후에는 한나라당에 줄을 댔던 국정원 직원들을 겨냥한 ‘살생부’까지 작성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DJ는 엄씨를 정권 초부터 기용하려 했으나 이종찬 원장의 반대로 무산됐다. 천 원장은 취임하자마자 엄씨를 2차장으로 임명했고, 엄씨는 국내정치 정보수집을 대폭 강화하고 활동 영역도 넓혔다. 언론인 출신인 황재홍 공보보좌관이 관할하던 대 언론관계 업무마저도 2차장 산하 대공정책실로 옮겼다.
▲ 옷로비 청문회. | ||
“옷로비 사건,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등을 겪으면서 검찰과 경찰이 흔들렸다. 국내 정치상황이나 민심이 여권에 불리하게 돌아감으로써 내부 정보 취합 및 단속의 필요성이 절감되고 있는 것이다. 집권 초기에 국정원이 국내 정보 수집을 등한시함으로써 공직자 기강확립이나 민심의 동향에 둔감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뼈아픈 반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DJ는 ‘천용택 체제’ 수립 이후 국내정치문제에 관한 국정원의 판단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옷로비 및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등에 관한 야당의 특검제 요구를 수용한 것도 국정원의 보고서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DJ는 99년 6월13일 김영배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이 특검제 수용을 건의했을 때만 해도 “당에서 논의해보라”는 원칙론을 고수했다.
김 대행은 ‘특검제 찬성’이 80%가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들고 갔으나 DJ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천용택 국정원장이 비슷한 여론조사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자 “특검제를 받아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은 국정원이 이후 각종 게이트 및 인사 잡음 등으로 얼룩지게 된 중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특히 전주 출신인 엄씨의 중용은 ‘화근’이었다. 엄씨는 김은성 대전지부장을 대공정책실장으로 정성홍씨를 경제과장으로 발탁, 이른바 ‘호남 마피아’시대를 열어간다.
김은성씨는 엄씨가 지병으로 사망한 후 2차장에 기용됐고 진승현 게이트 연루 혐의로 구속된다. 이들 호남 마피아는 국내정보 활동을 강화해 DJ의 구미에 맞는 보고서를 올렸고, 각종 이권에도 개입, DJ정권의 부패를 초래했다.
5·24개각에서 여론의 표적이었던 김태정 법무부 장관을 유임시키고 호남 출신을 대거 기용한 것도 DJ정권의 변신을 웅변해준다.
장·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 89명 중 호남 출신이 33%를 차지하게 된다. 초대 내각의 호남비율은 25% 안팎이었다. 김 법무부 장관을 유임시키고 DJ는 러시아, 몽골 순방에 나선다.
그동안 옷로비 의혹은 눈덩이처럼 부풀고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자연스럽게 DJ의 순방기사는 뒷전으로 밀렸다. 바로 이점이 DJ를 격노케 만들었다.
DJ는 “외국에 나가서 국익을 위해 고생하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통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과 한화갑 국민회의 특보단장은 당시 김 장관에게 사표를 미리 받은 뒤 DJ가 귀국하면 경질하는 쪽으로 정국 타개책을 마련했으나 실천하지 못했다. DJ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감히 김 장관에게 사표를 권유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99년 6월 말 터져나온 통일그룹 계열사인 한국티타늄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대주주인 보광에 대한 세무조사도 ‘DJ의 반격’으로 여겨졌다. 옷로비 사건을 둘러싼 언론의 공격적 보도에 맞서 ‘언론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관측이 유력했다.
통일그룹 계열사 세무조사는 물론 <세계일보>를 겨냥한 것이었다. 통일그룹이 금강산 관광사업 탈락 이후 <세계일보>가 연일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도 당시 DJ 친인척 문제를 심심치 않게 건드리는 등 불편한 관계였다.
자민련 박태준 총재는 정부와 <중앙일보> 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홍석현 사장과 세 차례나 만나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불발에 그쳤다. 홍 사장쪽보다 DJ정권의 핵심부 기류가 완강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중앙일보>의 국민회의 출입기자가 이영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세무조사 경위를 물은 적이 있다.
이에 이 대변인이 “<중앙일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여권을 무리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썼느냐. 심지어는 이희호 여사에 대한 허위기사 등을 보도해놓고도 한 번이라도 사과한 적이 있느냐. 하지만 이번 세무조사는 그에 대한 보복은 아니다”고 답변한 것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당시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하던 안정남 국세청장과 서울청의 Y국장이 모두 호남 출신이었던 점도 공교로운 대목이다.
비슷한 시기에 언론개혁에 관한 DJ의 주문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99년 6월22일 국무회의석상에서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일간신문 등록 등을 포함한 정기간행물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자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이 “일부 지방 신문사가 기자들 봉급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일간지 등록기준에 기자들에게 최소한의 봉급을 줘야 한다는 기준도 넣자”고 제안했다.
▲ DJ는 권노갑 전 고문을 다시 불러들이지만 그 는 게이트에 연루돼 개혁세력의 타깃이 된다. | ||
박 장관은 “해당사 기자들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없다”고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김 대통령은 “건전한 언론이 되려면 월급을 제대로 줘야 한다”며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이와 관련, 당시 여권의 관계자는 “DJ가 옷로비 파문을 겪으면서 언론개혁에 부쩍 깊은 관심을 보인다”고 전하기도 했다.
99년 7월에 DJ가 국민회의와 자민련 간의 합당을 추진했던 것도 ‘힘의 정치’에 집착했다는 점을 반증해준다. 당시 청와대 핵심 인사는 “합당론을 둘러싸고 청와대 내에서 두 기류가 있다. 양당이 합치면 거대 여당에 대한 역풍이 불 것이라는 게 반대론의 요체다. 2000년 총선에서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30대 유권자들의 JP(김종필 총리)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합당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합당론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DJ는 99년 7월17일 JP에게 전격적으로 청와대 회동을 제안할 정도로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모 신문사 고위간부들과 골프를 치고 난 뒤 총리공관에서 연락을 받은 JP는 즉각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DJ는 소위 ‘2+알파’라는 합당론을 설명했다.
이에 JP는 “그런 중요한 이야기는 밖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다. 당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JP는 기실은 합당에 부정적이었고, 특유의 은유법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DJ는 이를 ‘긍정’으로 오인하고 합당추진을 국민회의쪽에 지시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DJ가 이 시기에 권노갑 전 고문과의 청와대 면담을 부쩍 늘린 것도 심경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보비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일본에 체류중이던 권 전 고문이 귀국한 것은 98년 말이었다.
DJ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격 입국한 권 전 고문에 대한 DJ의 시선은 탐탁지 않은 편이었다. 권 전 고문을 가까이 둘 경우 ‘측근정치의 부활’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가 권 전 고문과 자주 면담하고 그의 행동반경을 확대해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믿을 사람은 측근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결과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당시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권 전 고문은 박지원 문화부 장관의 주선으로 청와대 면담을 가졌다.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이 견제했으나 정권 초기와는 달리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김 대통령이 심하게 외로움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옷로비 사건을 계기로 세상이 모두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서 권 전 고문이나 박 장관 같은 사람이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DJ가 옷로비 파문이라는 홍역을 치르면서 ‘힘의 정치’, ‘측근 정치’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한 것은 결과적으로 불행의 화근이었다. 다시 DJ 곁에 다가간 권 전 고문은 이후 이권 개입 의혹, 인사전횡 등으로 인해 개혁세력의 타깃이 됐고, 국내파트를 강화한 국정원 주도 세력은 정권 내부를 병들게 만들었다. DJ가 옷로비 파문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집권 당시의 초심을 유지하고 ‘열린 정치’를 지향했다면 국민의정부 5년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