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수상한 고객들>의 한 장면. |
지난 3월 30일 서울 중부경찰서는 1998년 1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약 14년간 A 생명보험에서 어드바이저(설계사)로 일했던 이 아무개 씨(여·47)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와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이 씨는 2009년 4월 피해자 김 아무개 씨를 비롯한 128명을 대상으로 환치기 투자 명목으로 총 117억여 원을 가로채고, 2011년 1월부터 2월까지 보험계약자 한 아무개 씨를 비롯해 106명의 계약자로부터 총 1억 9000만여 원을 수금받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1998년 A 생명보험사에 입사한 이 씨는 이번 사건이 터지고 해임 되기 전까지 설계사로 일하며 5차례나 ‘연도대상’(그해 전국보험판매왕)을 수상했다. 보험인들에게 있어 연도대상은 ‘보험의 꽃’이라고 불린다. 생명보험사 연중 최고 축제인 연도대상 시상식은 사장을 비롯해 전국의 보험 설계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호텔에서 화려하게 치러진다.
연도대상자들의 실적은 웬만한 중소기업에 버금간다고 한다. 이 씨도 2009 연도대상 수상 당시 연 60억 원 상당의 수입보험료를 달성했다. 게다가 이 씨는 2004~2006년까지 3년 연속, 2008~2009년까지 2년 연속으로 총 5 차례나 보험왕에 오른 스타 설계사였다. 그는 빈틈없는 보장설계와 노후, 상속, 재산 증식 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완벽한 재정컨설팅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보험우먼이었다고 한다.
이 씨는 자신의 지점이 담당하는 구역 중에서도 주로 현금 거래가 많은 동대문, 명동 일대 상가 상인들을 상대로 보험상품을 판매했다. 이 씨의 전략은 처음부터 보험 상품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상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저녁부터 새벽까지 상가 일대를 돌며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신뢰를 쌓는 것이었다. 그 결과 상인들도 이 씨의 노력에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됐고, 보험 계약자는 해마다 늘어났다.
첫 연도대상을 수상했던 2004 연도대상 시상식에서 이 씨는 “오늘의 큰 영광은 오로지 저와 A 생명을 믿고 보험에 가입해 준 고객 여러분들의 덕택”이라며 “앞으로도 고객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준비된 동반자, 가족 같은 동반자가 되겠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고객의 신뢰가 바로 보험왕이란 타이틀로 이어졌던 셈이다. 그 후에도 이 씨는 4차례 더 보험왕에 올랐고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이런 억대 연봉의 스타 보험왕이 어떻게 사기를 치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주식 투자 실패가 큰 원인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보험 계약자가 줄고 중도 해약자가 속출했다. 이로 인해 변액보험(보험계약자가 납입한 보험료 가운데 일부를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해 그 운용 실적에 따라 계약자에게 투자 성과를 나누어 주는 보험 상품)의 원금이 줄기 시작했고, 손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자금 지급은커녕 원금 보전도 어려워지게 됐다. 고객들에게 약속한 원금, 이자금 지급이 어렵게 되자 동대문, 명동 상인들을 상대로 환치기 투자 명목으로 사기쳐 투자금을 얻어 내게 된 것이다.
지난 2009년 3월 말, 이 씨는 동대문에서 의류상가를 운영하는 피해자 김 아무개 씨에게 “미국에 MLB를 운영하는 사장에게 돈을 송금한 뒤 다시 한국으로 송금받으면 환율 차익으로 중간이익금이 많이 남는데 이를 수익으로 이자를 지급하고 원금을 보장하겠다”고 속여 환치기 투자 명목으로 총 5억여 원을 받았다. 그는 김 씨 외에 128명의 상가 상인들을 상대로 총 117억여 원을 투자금으로 받아 가로챘다. 사건담당 경찰은 “이 씨의 계좌거래내역을 추적한 결과 이 돈이 실제 환치기 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 씨는 100억대의 투자금을 어디에 사용했을까. 조사결과 이 씨는 이 투자금을 2008년 1월부터 2011년 2월까지 3년간 변액보험 손실금을 돌려막는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금과 1000만 원당 월 60만 원의 이자를 지급하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자신의 연봉으로 손실금을 메우려다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사기를 저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후 이 씨는 손실금을 보전할 요량으로 개인적으로 주식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더 큰 화근이 됐다. 그는 주식투자 실패로 결국 보험 계약자가 납입한 보험금까지 손을 댔다. 이 씨는 지난 2월 11일까지 보험계약자 한 아무개 씨에게 보험료 75만 원을 수금한 뒤 보험사에 입금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소비하는 등 106명 계약자의 보험금 총 1억 9000여만 원을 횡령했다.
화려한 보험왕에서 사기왕으로 전락한 이 씨의 범죄 행각은 이 후 이 씨의 잠적을 이상하게 생각한 상인들이 경찰에 신고해 발각됐다. 이 씨는 경찰 조사에서 순순히 모든 혐의를 인정한 뒤 “자신을 믿어 준 상인들에겐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한편으로 후련한 마음도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 씨는 그간 돌려막기를 위해 사기를 치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의 범죄가 들통날 줄 알았던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 중부경찰서 이주만 경제팀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보통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죄행각이 드러나고 조사를 마치게 되면 이 씨와 같이 끝없이 이어지던 자신의 죄가 마무리됨에 오히려 후련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경찰이 보험사 측에 피해자 조사를 의뢰한 결과 피해 보상은 회사가 모두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환치기 투자금 사기 혐의 부분은 개인 간 금전 거래로 회사와 별개 문제라는 것이 A 보험사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보험 계약을 맺은 뒤 보험료 수금 과정에서 발생한 횡령(불완전 판매)에 대해선 회사가 보상할 방침을 밝혔다고 한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는 바로 동료 보험설계사들과 보험업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이미지에 적잖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훈철 인턴기자 boaz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