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상선 경영권을 둘러싼 현대그룹과 범현대가 기업들간에 신경전이 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일 고 정주영 명예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에 참석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현대그룹 측은 우선주 확대 목적을 “긴급 투자재원 마련”이라 밝혀왔지만 실제로는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 방어 차원일 것이란 관측이 주를 이뤄왔다. 현대그룹 측에 따르면 현 회장과 특수관계인, 그리고 우호세력의 현대상선 지분을 합하면 42%에 이른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율은 23.8%이며 KCC와 현대백화점이 보유한 지분도 4%를 넘어선다. 현대차그룹이 인수한 현대건설의 현대상선 지분율도 7.8%에 이른다.
지난 2003년 남편 정몽헌 회장 타계 직후 현정은 회장은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는, 이른바 ‘시숙부의 난’을 겪었다. 시동생인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와도 갈등관계를 형성해온 현 회장으로서는 35%가 넘는 현대상선 지분을 보유한 현대가의 경영권 침공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현대중공업 측이 주총 전부터 우선주 발행한도 확대 반대의사를 표명한 데 이어 주총장에서 관련 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해 부결시켜 버렸다. 이 때문에 현정은 회장과 현대가 간의 경영권 분쟁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현대중공업뿐만 아니라 KCC 현대백화점 등 현대가 기업들이 현 회장 발목잡기에 대거 동참했다는 점이 현대그룹 내 위기감을 키우는 듯하다.
이날 주총장에서는 핫 이슈였던 우선주 발행한도 확대 관련 의안 이전에 이사보수 한도 승인의 건부터 현대중공업그룹이 반대 의견을 제시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현대상선은 이사보수 한도를 현행 80억 원에서 100억 원으로 확대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과 삼호중공업 대리인들이 경쟁 해운사들의 이사보수 한도액을 예로 들며 과도하다고 반대한 것이다. 이 안건도 결국 표결을 통해 총 의결 주식수의 과반을 넘겨 통과됐다.
주총 직후 현대그룹 측은 “현대중공업그룹 등 범 현대가가 지난해 말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불참하면서 더 이상 경영권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이번 주총에서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 경영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고 밝혔다.
이번 주총 격돌과 관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속내에 대한 궁금증 또한 커지고 있다. 현대상선 주총을 앞둔 시점에서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현대차그룹에 넘어간 현대건설의 주총 참석 여부였다. 현대건설의 찬성 혹은 반대 의견 행사가 곧 정몽구 회장의 의중일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주총에 참석하지 않았다. 외형상 중립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재계에선 “정 회장이 사실상 현대가 기업들을 밀어준 것”이란 해석을 내리는 분위기다. 정몽준 의원 등 현대가 인사들이 정 회장의 의중과 무관하게 현대상선 주총장에서 실력행사를 했다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선 현대차그룹에 대한 현대그룹 측의 노골적인 현대상선 지분 요구가 정몽구 회장의 반감을 샀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지난 3월 14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 추모음악회에 참석한 현정은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을 향해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현 회장은 정 회장과 화해할 의사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까지 (정몽구 회장에게) 화해 제의를 받지 못했다”며 “현대상선 지분이 우리에게 와야 한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몇몇 재계 인사들은 “현대가 맏형인 정 회장 입장에선 제수(현 회장) 입장이 안타까워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모양새라면 모를까, 제수가 강하게 밀어붙이자 지분을 내주는 식으로 비치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정 회장은 현 회장과 앙숙인 정몽준 의원과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입장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현대차그룹은 현대건설 인수가 최종 마무리되는 4월 중으로 새 기업이미지(CI)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를 기점으로 정 회장의 아들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승계 작업에도 가속이 붙을 전망이다. 중대사를 앞둔 정 회장이 집안 내 지분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만큼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에 대해 조만간 구체적 결단을 내릴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은 1104만 8227주(보통주)다. 3월 24일 현대상선 종가 3만 2200원으로 환산하면 3558억 원에 이른다. 사실상 이를 손에 쥐고 있는 정몽구 회장과 지분 획득을 원하는 현정은 회장, 그리고 범 현대가 인사들이 빚어낼 마찰음은 당분간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