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정동영(왼쪽), 정세균(가운데), 박주선 최고위원이 회의를 경청하고 있다. 호남 의원 ‘수도권 차출론’이 제기되는 가운데 정세균 최고위원은 수도권 출마를 공언한 상태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그 위기감은 KBS 수신료 인상 문제로 오락가락했던 리더십 문제부터, 손학규 대표의 햇볕정책 수정논란을 포함한 정책 노선 문제에 이르기까지 첨예하게 표출되고 있다. 일부에선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총선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비주류인 장세환 의원은 지난 7일 성명을 내고 “한나라당이 7월 4일 전당대회를 통해 ‘변화’를 선택했는데, 민주당은 변화에 저항하는 반개혁적 움직임, 선사후당(先私後黨)적 이기주의, 무사안일만 감지되고 있다”면서 “이래서는 내년 총선과 대선승리는커녕 총선부터 참패가 예상된다”고 맹비난했다.
장 의원은 “변화하는 한나라당과 안주하는 민주당의 모습으로 치르는 내년 총선이 민주당의 참패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정체성을 의심받는 우유부단한 리더십과 상대를 깎아내리고 올라서려는 소아병적 리더십으로도 총선 승리는 물 건너간다”고도 했다. 최근 손 대표와 정동영 최고위원이 공개적으로 벌인 설전을 꼬집은 것이다.
이 같은 위기감은 점차 ‘공천쇄신’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천정배 최고위원이 주도하고 있는 당 개혁특위는 조만간 국회의원 선거 후보 공천과 당 대표 선출에 관한 최종안을 만들어 최고위원회의에 보고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큰 줄기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공천의 경우 지역위원장이 경선 전에 사퇴해야 하고, 경선과 함께 ‘배심원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배심원제의 적용 지역은 당세 우세지역, 혹은 경선 경합지역 위주로 전체 30% 지역에 대해 적용하는 방안이 제시돼 있다.
그러나 배심원제의 경우 ‘호남물갈이론’이란 해석을 낳으면서 호남지역 현역 의원들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 당 중진들의 잇따른 영남 출마 선언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서울에서 재선을 지낸 김영춘 최고위원이 부산 진구 갑 출마를 일찌감치 공식화했고,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이 부산 영도에서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과의 맞대결을 공언한 데 이어 지난 6일에는 전북 전주에서 4선을 지낸 장영달 전 의원이 불모지인 경남 함안·합천·의령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은 이를 두고 “선당후사의 희생정신이 민주당의 전국정당화와 내년 총선 승리, 정권교체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중진 인사들의 영남 출마 러시에는 최근 들어 달라진 지역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경남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노무현 바람’, 국책사업 유치 불발에 따른 여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맞물려 부산·경남에서도 해볼 만하다는 기대가 생겨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뚜렷한 호재가 예상되는 상황도 아닌 시점에 ‘불모지’ 출마선언이 잇따르는 흐름에는 분명히 ‘확연한 정서’가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장 전 의원의 ‘희생’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결국에는 민주당 ‘안방’에 자리 잡은 호남 현역 의원들에 대한 ‘압박’이 커지게 되는 셈이다.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수도권 차출론’도 기득권 포기를 종용하는 당내 기류와 맞물려 있다. 텃밭의 다선 의원들이 당세가 약한 수도권 지역에 출마하는 모습을 통해 쇄신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리다.
현재까지 호남 지역에서 수도권 출마를 공언한 인사는 정세균 최고위원 정도다. 그는 당 대표 재임 때인 2009년 4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동영 최고위원과의 공천 갈등 와중에 ‘19대 호남 지역구(전북 진안·무주·장수· 임실) 불출마’ 카드로 배수진을 쳤다. 그의 주변에는 ‘정치 1번지’ 종로 출마 권유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종로는 지역위원장이 없어 다른 후배들의 텃밭을 빼앗을 필요가 없는 데다 정치 1번지로 나갔다는 상징성도 있기 때문에 적격지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서울 종로의 경우 손 대표가 지난 4· 27 재보선에서 경기 성남 분당 을로 옮겨가면서 현재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지역위원장을 대행하고 있다.
당내에는 정 최고위원 이외에 호남 중진 1∼2명도 수도권 출마 여부를 조심스레 고민 중이라는 얘기도 돌고 있다. 당 관계자는 “호남 중진들이 텃밭에서 땅 짚고 헤엄칠 게 아니라 자기희생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당내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총선에서 서울 입성에 실패한 뒤 전주로 옮긴 정동영 최고위원에 대해서도 ‘수도권 차출론’은 껄끄러운 흐름이다. ‘당권이냐, 대권이냐’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그로서는 당을 위한 희생과 쇄신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쇄신 바람에 기댄 이 같은 흐름에 대해선 호남 내 반발이 거세다. 광주 출신의 박주선 최고위원은 “인위적으로 지역구를 바꾸는 방식의 물갈이는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며 “국민이 바라는 방법도 아니고 쇄신과도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호남 출신의 한 중진 의원은 “선거 때 호남표로 당선되고도 선거만 끝나면 호남당 탈피를 외쳐서 되겠느냐”면서 “전통적 지지층을 홀대한 채 새로운 지지기반 구축에 나서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 호남권 인사는 “호남에 대한 ‘역차별’ 움직임이 가시화된다면 호남 인사들이 본격적인 공동대응 내지 세 결집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당 쇄신에 대한 압박이 자칫 공천개혁을 둘러싼 소장파와 중진, 비호남과 호남지역 간의 갈등으로 격화될 조짐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