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는 17대 총선에서 탄핵역풍을 뚫고 ‘견제 의석’을 만들어냈다. 작은 사진은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개표상황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정치권은 오는 10월 국정감사 종료와 함께 본격적인 총선 체제로 들어갈 전망이지만 지금 물밑에서는 치열한 공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예비후보들은 점찍은 지역구에 ‘조용히’ 사무실을 내고 누가 ‘적’이 될지 전력탐색에 여념이 없다. 특히 여든 야든 정치 지망생들이 가장 주목을 하는 점은 현재 대권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의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다.
한나라당 친이계 후보들은 박 전 대표가 사실상 당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라 공천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한다. 민주당도 박 전 대표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박풍’을 일으킬 경우 텃밭 다지기와 상관없이 큰 물결에 휩쓸려갈 수도 있다며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총선 ‘재수’를 하고 있는 정치권 인사 A 씨는 내년 서울 강북의 한 지역구 공천을 신청할 예정이다. 현재 친이계 핵심 B 의원이 이 지역구를 훑다시피 하며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지역정가에서는 내년 총선 공천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친이 실세로서 몇 차례 구설수에 오른 전력으로 인해 공천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다. A 씨는 B 의원 대신 친박 측 C 씨가 이 지역에 ‘박근혜 바람’을 타고 공천을 따낼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표밭갈이를 해온 A 씨는 지역 정서에 민감하고 여야를 떠나 공천 정보에도 꽤 밝다. 그는 내년 총선에서 서울의 친이계 후보들이 대거 낙마하고 그 빈자리에 친박 측근들과 새 인물들이 영입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도 ‘박근혜 경계령’에 근거를 두고 예상후보를 점찍어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A 씨는 이에 대해 “일단 내년 총선에서 서울의 경우 한나라당이 48개 지역 가운데 10석 정도만(18대 40석 차지) 건질 것이라는 게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전망이다. 분당 을에서 이미 한나라당이 패배하며 학습한 경험이 있지 않느냐. 한나라당은 서울에서 크게 고전할 것인데 10석도 그나마 ‘박근혜 바람’으로 지킬 것으로 본다. 10석 이상을 보는 전문가들도 많은데 대부분 ‘박풍’이 아니면 건지기 힘든 숫자로 보고 있더라. 이는 지역 내 민주당 예비후보들도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다. 박풍이라는 절대변수만 넘어서면 민주당이 서울은 싹쓸이할 것이라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나라당 친이계 주변에서는 내년 총선 공천을 두고 ‘박근혜 경계령’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앞서 A 씨의 견해처럼 친이계가 장악하고 있지만 비리에 연루되었거나 지역구 관리를 소홀히 한 경우 친박계 후보들로 대거 교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서울지역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와 핵심 측근들이 현재 공천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지역정서는 이미 ‘박근혜 올인’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한 번 유세지원에 몇 천 표가 왔다 갔다 하는데 누가 그의 지원을 마다하겠는가. 벌써부터 어떤 지역구 친박 후보들은 ‘박 전 대표에게 공천 내락을 받았다’며 떠들고 다닌다더라. 한나라당의 경우 서울과 수도권은 박근혜 보증수표를 받았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내년 총선 공천 기조는 7·4 전당대회가 낳은 지도부 입지에 따라 일정 정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이미 총선 공천에 대해 ‘신사협정’을 맺은 이상 박 전 대표의 ‘사인’ 없이 공천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가의 정설이다. 친이계로서도 박 전 대표의 유세지원이 절실하기 때문에 무조건 자파 후보를 내세울 명분도 없다.
내년 총선 공천이 이렇게 ‘박근혜 중심’으로 돌아갈 움직임을 보이자 친이계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이번 총선은 상향식 공천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공천 압력이 쉽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지역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은 ‘10당 9락’(지역구 활동 하루 10시간이면 당선, 9시간이면 낙선)이 공식처럼 돼 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압도적인 대권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박 전 대표의 정치 영향력상 친박 후보들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일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조직을 탄탄히 해서 여론조사 등의 외부변수에 최대한 맞선다는 게 친이계의 전략이다.
그럼에도 현재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친이계 살생부가 있다는 말도 나온다. 특정 실세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해온 초선 D, E 의원 등의 경우 내년 공천이 사실상 어렵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당 주변에 퍼지고 있다. 지역구나 정책 활동보다 계파 싸움에만 몰두하면서 당 분위기를 흐렸기 때문에 친박계에 찍혔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도 박 전 대표와 계파 근절을 여러 차례 합의했기 때문에 계파이익을 앞세워 활동한 의원들의 경우 공천에 불이익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총선을 준비 중인 친박계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친이계로서도 현재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구를 모두 수성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 있는 일부 친이계 지역구의 경우 다른 친이계 예비후보들이 ‘친박계 후보가 올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공천경쟁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는 얘기도 있더라. 이런 소문 때문에 친박계 인사들이 친이계 지역구를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내년 총선 공천의 바닥 분위기는 이미 ‘박근혜 대세론’의 또 다른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 등 공천 영향력이 막강한 권력 핵심들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그래서 여의도에서는 “지난 청와대 회동 때 내년 공천의 구체적 쿼터까지 정해진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친 이재오계는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는 친 이재오계로서는 영남 기반의 박 전 대표가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까지 점령할 경우 사실상 계파가 소멸하게 되는 셈이다. 실제 향후 공천에서 친 이재오계가 친박계에 싹쓸이 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면서 7·4 전당대회 선거운동 과정에서 친 이재오계가 원희룡 의원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강하게 저항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전당대회 룰 개정과 관련한 전국위원회의 결정이 법원에 의해 뒤집어져 다시 추인을 하게 되는 우여곡절도 친 이재오계의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나온 후유증이다. 전국위원회에 참석했던 청와대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참석자도 별로 없었는데 친 이재오 측 인사 몇 명이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흐리는 것 같아서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쪽 사정이 다급한 것도 있지만 엄연한 전국적인 정당 행사인데 너무 계파이익에 매몰돼 있었다. 이번 전대에 공천문제가 걸린 게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수도권에 자파 의원이 별로 없는 박근혜 전 대표로서는 내년 총선이 세력 확장의 최적기다. ‘박근혜 친위대’가 대거 수도권에 진출할 경우 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뛰는 훌륭한 손발이 될 수 있다. 수도권 기반의 친이계가 공천 물갈이 괴담에 떠는 이유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영남공주’ 벗고 ‘전국여왕’ 노린다
전국 245개 국회의원 지역구 가운데 수도권에는 거의 절반인 111개 지역구가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 80개 지역구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선 극히 비관적 전망이 나온다. 서울 48개 지역구 가운데 10~15석을 얻는 데 그칠 것이란 전망과 함께 수도권에서도 18대의 절반 수준으로 의석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런 비관적 전망을 잠재워 줄 유일한 변수가 바로 ‘박풍’이다. 한나라당은 박풍 이외에 대안이 없다. 대권 지지율 30%대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근혜 브랜드가 총선 참패를 그나마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지난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뚫고 천막당사 정신과 붕대 투혼으로 121석의 ‘견제 의석’을 만들어냈다. 열린우리당이 200석 이상을 석권하며 압승을 거둘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 이뤄낸 ‘기적’이었다.
하지만 내년 총선은 상황이 다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평가라는 점이 선거 전반을 꿰뚫을 경우 ‘박풍’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본선인 대선을 위해 박 전 대표가 정치생명을 모두 거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자칫 ‘패배 책임론’에 휩싸여 지난 2002년 지방선거 패배 뒤 후보교체론에 시달렸던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재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박 측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가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에 ‘올인’을 해야 대선에서 승산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수도권 총선 올인 전략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박 전 대표가 친박 핵심인사와 외부 인사들을 직접 영입, ‘박근혜 친위대’를 이끌고 수도권 승리를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친박 측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내년 총선을 통해 친이-친박 계파를 넘어서는 ‘박근혜 주류세력’이 탄생할 것이다. 여기에는 친 이재오계의 대거 낙천 등 필연적인 권력투쟁이 수반된다. 친이계 물갈이 괴담이 나올 정도로 대대적인 공천 혁명이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친위부대를 이끌고 수도권에서 바람몰이를 한다면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보수 세력 재결집의 중심 역할을 잘 해낸다면 수도권 승리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나라당이 내년 총선에서 참패할 것이라는 예상이 광범위하게 퍼진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감이 오히려 보수 세력의 재결집을 유도할 것이라는 분석에 근거해서다. 현재로선 보수 세력의 ‘대동단결’을 이뤄낼 인물이 박 전 대표밖에 없다. 탄핵역풍을 ‘박풍’으로 막은 전례가 있는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가 수도권에 올인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영남공주’에서 명실상부한 ‘전국여왕’으로 거듭나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대에서 수도권 기반 후보가 6명이나 나온 점만 봐도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의 비중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수도권에서 박 전 대표가 승리를 이끌 경우 영남 위주의 지지층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표의 확장을 이뤄낼 수 있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내년 총선에서 박 전 대표가 사실상 승부를 보아야 한다. 만약 박 전 대표가 예상을 깨고 수도권 후보들을 이끌고 선전한다면 대선의 경쟁력을 마지막으로 인증 받는 셈이다. ‘박근혜 대세론’이 확장된 표로 굳어질 경우 대선 레이스는 그의 일방적 독주로 끝날 수 있다. 수도권 승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박 전 대표는 친이·친박계가 함께하는 초계파 초선모임인 ‘선진과 통합’ 회원 10여 명과 오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 서울 의원이 “지역구 사정이 참 안 좋다”라고 말하자 “지역구 사정이 안 좋은 것을 언제 체감하느냐”고 물었고, 이에 해당 의원은 “당원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런 말들이 나온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당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평소와 달리 총선 분위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내년 총선에 임하는 자세를 미리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