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2월 25일 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장에 참석한 노태우, 전두환, 고 최규하,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부터)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YS에게 대선자금 3000억 원을 건넸다’고 밝혀 큰 파장이 일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노 전 대통령이 1981년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형집행을 만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만일 김대중 씨를 사형집행 한다면 내 동기이자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독재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독재자라는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전 전 대통령역시 공감했다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지휘한 비화도 실었다. 올림픽 유치계획을 공식선언한 것은 1979년 10월 8일이었다. 하지만 공식신청서까지 제출했으면서도 정부는 현실적으로 유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그는 개최지 결정을 28일 앞둔 9월 2일 전 전 대통령에게 “올림픽은 꼭 유치해야 하니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려달라”고 건의서를 올렸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12·12사태와 6·29선언 등 주요 정치적 사건의 뒷얘기도 공개했다. 그는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과 관련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사고였다”며 “쿠데타가 성립될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구성 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10·26사태 직후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신군부가 모인 30경비단을 포위했다”며 “나는 자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0경비단에 들어온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우리는 ‘기회는 이때’라고 판단해 군을 출동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의 백담사행에 대한 소회도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이원조 의원에게 “전 전 대통령 내외가 국내의 조용한 곳에 거처를 정해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 있는 것이 어떤가”라고 권유했다고 회고했다. 직접 나서서 국민을 설득할 생각도 수십 번 했으나 야합의혹이 제기될 것이 자명했고, 폭동마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전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서 외지고 험준한 백담사를 은둔처로 정했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밤 전 전 대통령은 전화를 걸어 백담사 은둔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지켜주지 못해 부끄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 출마포기를 설득한 얘기도 흥미롭다. 노 전 대통령은 “김 회장이 국제감각에 익숙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참신한 사람이라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주영 회장이 이번 선거를 혼탁하게 만든다는 것으로도 어려운데 김 회장까지 정치에 뛰어든다면 김 회장과 대우가족, 나아가 국민들의 불행만 초래할 것이 훤히 보인다. 그래도 출마할 작정이냐”라고 만류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 회장이 “참신한 사람을 기르는 당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반문하자 그는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을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서 김 회장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고 당신 또한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깔끔한 성격인 김 회장은 “저는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또 1990년 3월에는 롯데 신격호 회장이 찾아와 잠실 롯데월드를 100층으로 지으려 하는데 못 짓게 한다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고 적었다. 신 회장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지만 다음 정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6공화국 책임으로 보는 주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은 “6공화국 말에 총 외채는 430억 달러, 순외채는 100억 달러 내외였으나 YS정권 들어 4배 가까이 늘었다”며 임기 중 재정적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YS정부 들어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은 금융산업을 방만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돈을 풀어 기업들이 멋대로 자금을 관리하도록 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라는 것이다.
북방외교 및 대북관계에 얽힌 비화도 공개했다. 그는 한·중 수교 과정에서 “중국 측이 ‘북한에 사전 통보하지 않을 테니 한국도 어느 나라에도 (수교 협상을) 알리지 말라’고 강력히 요청해 대만에 알리지 못했다”며 “그 결과 대만이 수교 단절 등의 조치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1992년 봄 윤기복 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며 “하지만 초청 시기가 김일성 생일과 맞물려 있었고, 당시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거절했다”는 비화도 실었다.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해서는 “1988년 취임 직후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메네트리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대한민국에 (미군) 전술핵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언론에서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한 곳뿐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1991년 가을 ‘미국이 전세계에 배치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에서도 철수할 것 같다’는 정보보고를 받았고,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주도권을 잡겠다는 생각에 그해 11월 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고 회고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내용은 정치자금에 대한 부분이다. 이와 관련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작성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는 마당에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으로 인해 또 다른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역사와 국민 앞에 내 인생과 철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남겨놓는 진실된 술회라고 믿어주었으면 한다”는 소회를 남겼다.
그는 1992년 대선 당시 민자당 대선후보였던 YS에게 3000억 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김영삼 총재는 1992년 5월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내게 ‘(대선에서) 적어도 4000억~5000억 원은 들지 않겠습니까’라며 대선자금을 부탁했다”며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이원조 의원을 김 총재에게 소개시켜주고 이들을 통해 2000억 원을, 그 뒤 대선 막판에 김 후보 측의 긴급 지원요청에 따라 직접 1000억 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이에 YS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이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런 비자금의 원천은 대기업이었고, 청와대가 직접 돈을 관리해왔다. 기업인들이 대통령을 면담하면서 ‘통치자금에 써달라’고 봉투를 내놨고, 이 봉투는 곧바로 ‘청와대 금고’에서 관리됐다는 설명이다. 이 비자금은 민정당에도 투입됐다.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 시절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당 운영비는 사무총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령해서 집행했다”며 “내가 국정을 책임진 후에도 이런 관례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92년 대선에서 3000억 원가량을 김영삼 후보에게 지원하고도 엄청난 액수의 돈이 남았고, 1995년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당시엔 이자를 제외한 원금만 2757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이 비자금을 자신이 관리한 것에 대해선 “김영삼 당선자가 청와대에 오지 않아 자금을 전해줄 수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노 전 대통령은 친인척과 친지, 학교 동기와 선후배, 고향사람들에 대한 미안함도 전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챙겨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했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 사례까지 있었다. 친인척 가운데 능력 없이 어떤 직책을 받거나 큰돈을 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자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례로 처남인 김복동, 동서인 금진호 같은 이들은 능력이 출중함에도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에 중용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박철언 전 장관의 경우에는 측근들에게 “‘박철언은 친인척 개념에 넣지 말라’고 이해를 시켰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부터 공직에 기용됐던 사람”이라고 밝혔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박근혜 보며 ‘부친 참 외롭겠네…’
노전 대통령은 1956년 처음 만난 박정희 사단장에 대해 “체구가 작은 편이면서도 침착하고 속이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회고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회고록을 쓰면서 여러 번 자문했던 것은 ‘나는 왜 그의 인간됨과 역사관을 오판했을까’ 하는 것들이었다. 취임 전 만나보니 그는 정치에서 쌍방 간에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1987년)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그는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2년간 매주 만나다시피 했고, 내 옆에서 국가 경영을 봐오기는 했지만 진지한 면보다는 피상적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이었다. 권력을 향해 하나에서 열까지 투쟁하는 자세가 변함없이 엿보이곤 했다”고 술회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수없는 난경을 겪어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고 관찰력이 예리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총명함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92년 대선 때) 김 총재가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의 정마저 일었다”고 회고했다.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해서는 “30년 가까이 국정에 몸담아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믿음직스럽게 여겨졌다”고 평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활동적 인물이었고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지만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는 없었다”며 “인식의 차이로 해서 전임자인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털어놨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선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년가족 식사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날밤 1개를 집어 큰 영애(근혜)에게 주었는데 근혜 양이 받지 않았고,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옆에 있던 근영 양이 ‘아버지, 저 주세요’라며 받아 입에 넣었다”며 “그 장면을 보면서 박 전 대통령이 참 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평당 60만 원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고 전 전 대통령을 속였다며 그의 인간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