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표. 오세훈 시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에 대해 친박 의원들은 달갑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정오. 여의도의 한 음식점으로 몇몇 전·현직 의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친박 중에서도 핵심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었다. 가벼운 식사 자리였지만 박 전 대표의 대권과 관련된 얘기들이 나왔고, 그중에서도 핫 이슈는 단연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권 불출마 선언(8월 12일)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전직 의원 측근은 “그것(불출마) 때문에 만난 것은 아니고 오래 전부터 잡힌 약속이었다. 그런데 마침 오 시장 불출마 선언 직후여서 그 의도와 파장 등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공개하기 어렵다”면서 “박 전 대표에게도 그날 오갔던 얘기들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밖에도 오 시장의 불출마 선언 이후 국회 주변 곳곳에서는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한 친박 관계자들의 회동 장면이 여러 차례 포착됐다.
이처럼 친박 측이 오 시장 불출마에 ‘남다른’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현 대권 레이스에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에선 오 시장의 이번 불출마가 박 전 대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지지율) 차이가 크긴 하지만 오 시장은 엄연히 여권 잠룡 2위였다. 서울시장이라는 수도권 프리미엄을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치고 올라올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더군다나 오 시장은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한 경험을 가진 친이계 지원을 받고 있다. 오 시장 불출마로 박 전 대표는 잠재적 라이벌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정치권 관계자들 역시 이러한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친박 의원들은 부정적인 속내를 내비치고 있다. 내년 대선까지 ‘박근혜 대세론’이 유지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 친박으로선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에 대해 반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오 시장이 불출마를 선언한 그 진정성에 의문부호를 달기도 한다. 주민투표로 벼랑 끝 위기에 내몰린 오 시장이 그동안 무상급식과 관련해 일정거리를 유지해 온 박 전 대표의 도움을 받기 위해 대권 불출마 전략을 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 전 대표 핵심 참모들은 이제 와서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기류는 지난 8월 18일 친박 핵심 유승민 최고위원의 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유 최고는 “주민투표에서 이기든 지든 당은 곤란한 위치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표 역시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말을 아끼고 있지만 사실상 유 최고위원과 비슷한 생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7월 19일 대구를 방문했을 때 “무상급식은 자치단체의 사정과 형편에 맞춰서 해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박은 왜 오 시장의 대선 불출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한 친이계 중진 의원은 비공개 석상에서 기자들에게 “오 시장의 다급한 SOS 요청을 박 전 대표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형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선 친박은 오 시장 불출마를 계기로 지난 7·4 전당대회 이후 사실상 와해된 친이계가 반격을 도모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벌써부터 몇몇 친이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대세론에 안주해 당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고 있다” “주요 정치 이슈를 피해가는 작전으론 본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말들을 흘리며 박 전 대표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나경원 최고위원도 지난 8월 17일 “박 전 대표가 도와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며 박 전 대표의 미온적 자세를 꼬집은 바 있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조금씩 잽을 맞다 보면 박 전 대표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친이로서는 썩 괜찮은 공격 ‘거리’를 찾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여권 핵심부에서 꾸준히 거론돼 왔던 ‘제3후보론’이 탄력을 받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친박 의원들도 눈에 띈다. 오 시장이 후보군에서 탈락함으로써 김문수 경기지사, 이재오 특임장관, 정몽준 의원 등 기존의 차기 주자 이외에 또 다른 인사를 물색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박 전 대표 독주’로 요약할 수 있는 여권의 대권 판세는 크게 요동칠 수 있다. 친박 의원의 한 보좌관은 “오 시장이 여권 잠룡 중 2위라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지지율 한 자릿수다. 박 전 대표와 상대가 되나. 오 시장이 신경 쓰인다기보다는 지금의 구도가 깨지는 게 염려스러운 것”이라면서 “김문수 정몽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지만 새로운 후보가 급부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구심점을 잃었던 친이가 다시 ‘반박’이라는 기치 아래 단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오 시장 불출마 선언 직후 친박 일각에선 ‘경선 흥행 실패’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기도 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등장으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야권 차기 경쟁에 비해 이대로라면 한나라당 경선이 싱겁게 끝나 본선에서 박 전 대표가 불리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2007년 경선 패배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대다수 친박 의원들 생각은 다른 듯하다. 재미가 ‘조금’ 줄어들더라도 ‘확실한’ 승리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친박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 시장 불출마를 빌미로 친이계가 대권 구도를 뒤흔들려 하는 것을 더욱 염려하고 있다. 또한 오 시장이 무상급식 투표에서 승리할 경우 말을 바꿀 것이란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보좌관 출신 이재광 정치학 박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정치 아니냐”면서 “위기에 빠진 오 시장이 투표에서 이기고 힘을 얻는다면 상황에 따라 대권 불출마를 번복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오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박 전 대표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 시장 불출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친박에 대해 친이 측은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8월 24일 치러지는 무상급식 투표 결과가 내년 총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데 너무 대권과 결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쓴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복지’를 최우선 대권 공약으로 내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박 전 대표가 오 시장에게 그 ‘화두’를 빼앗기자 발목을 잡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수도권 친이 의원은 “오 시장의 불출마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치자. 평소 2위권 잠룡들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며 대세론을 내세웠던 친박 아니냐. ‘통 크게’ 도와 줄 순 없는 문제였는지 아쉽다”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