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드라마 <스파이 명월>은 여주인공인 한예슬이 촬영을 거부해 한때 몸살을 앓았다. |
최근 한예슬의 촬영 거부 사태로 몸살을 앓았던 KBS 2TV 드라마 <스파이 명월>. 이 드라마에는 이덕화 조형기 유지인 등 유명 중견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이번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이들의 반응과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딱히 한예슬을 옹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단 한예슬에 대한 성토가 자칫 드라마 자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스파이 명월>의 한 제작 관계자는 “이덕화 등 중견 배우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를 다독였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중견배우들은 배우 한 명보다는 드라마 자체를 더 중시하는 편이다”라며 “때문에 한예슬이 제작진과 대립하며 촬영에 불참할 때도 묵묵히 현장 분위기를 다잡았다”고 귀띔했다.
반대로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잡는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중견배우도 있다. 배우 이미숙이 대표적이다.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이미숙의 진가는 영화 <여배우들>을 촬영할 때 빛을 발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여배우들>에는 이미숙 외에 윤여정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다. 데뷔 기간은 다르지만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을 책임질 만한 인지도를 가진 여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터라 트러블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이 분위기를 단숨에 제압한 이가 바로 이미숙이다. 이미숙은 윤여정이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달려 나가 깍듯이 인사하며 보필했다. 이후에도 이미숙은 윤여정의 한마디 한마디에 빠르게 반응해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여배우들>의 촬영 현장에 있던 관계자는 “일종의 ‘이이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숙은 암묵적으로 자신이 윤여정에게 하듯 후배들도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눈치 빠른 여배우들도 이를 간파하고 서열을 확실히 지켜나갔다”고 말했다.
윤여정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윤여정은 <여배우들>의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이)미숙이가 괜히 그럴 애가 아니지. 얼마나 영리한데. 덕분에 후배들도 예의 바르고, 나도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지”라고 말했다.
제일의 입담꾼으로 불리는 조영남마저 꼼짝 못하게 만드는 윤여정 역시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중견배우로 유명하다. 이순재가 ‘미스터 쓴소리’라면 윤여정은 ‘미시즈 쓴소리’라 불릴 만하다. 그는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의 제작발표회에서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하면서 고까울 때가 많다. 너무 버릇이 없고 경로사상이 부족해 기가 막힌 적도 많다”며 “배우가 우아한 공주나 광고모델 같은 캐릭터로만 알려져서는 안 된다”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대부분 중견 배우들은 ‘바로잡기’보다는 ‘피하기’를 택한다. 괜한 불협화음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배우 A는 리허설 때 대역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에는 원로급 배우인 B와 함께 출연하는 장면에서 대역을 내보냈다고 B가 격분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은 B가 참고 넘기며 무마됐지만 업계에서 A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졌다.
이는 여전히 스타 마케팅을 원하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탓이 크다. 스타급 배우에 초점을 맞춰 모든 스케줄을 잡다보니 까마득한 선배인 중견배우들을 챙기는 것은 뒷전이 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침묵을 택한다. 그들은 스타보다는 생활형 배우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 중견배우는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인기가 곧 권력인 연예계에서 스타들의 버릇없는 행동을 일일이 바로잡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괜히 다루기 힘든 중견배우라는 선입견이 생겨 섭외 대상에서 배제되기보다는 촬영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을 고르자는 마음이 더 크다.”
가요 프로그램 대기실의 풍경은 이런 드라마 제작 환경과는 사뭇 다르다. 오랜만에 컴백하는 가수가 있으면 후배 가수들이 선배 가수의 대기실까지 직접 찾아가 인사하며 자신의 앨범을 선물한다.
한 가요 관계자는 “올해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 C가 오래간만에 복귀한 D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아 ‘버릇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니저까지 긴장한 일이 있었다”며 “당연히 C의 인기가 더 높지만 선배를 잘 모셔야 한다는 인식이 잘 잡힌 터라 심기가 불편해진 D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고 밝혔다.
결국 연예계 전반이 아닌 드라마 촬영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 촬영 시간에 쫓기듯 자신의 분량만 소화하고 각자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선후배 간의 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비교적 중견배우들의 역할이 큰 연속극이나 주말극과 달리 스타급 주연 배우 한두 명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미니시리즈의 경우 이런 경향이 강해진다.
또한 드라마라는 큰 틀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배우의 경우 데뷔 시기가 빠른 중견배우라 할지라도 비중이 큰 역할을 맡은 스타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