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식품회사에 근무하는 C 씨(31)는 토요일 출근길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여인이 한 명 있다. 그는 평소에 지하철이 붐벼 거의 서서 출근한다. 그나마 한적한 토요일이 앉아갈 수 있는 유일한 날, ‘팡팡녀’를 만나면 괴로워진다.
“토요일 아침 조용한 지하철 자리에 앉으면 잠이 스르르 옵니다. 그런데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그 평화가 깨질 때가 있어요. 한 여성이 항상 민낯으로 들어온 다음 제 주변에 앉아서 몇 분 지나지 않아 화장을 시작합니다. 대부분 제가 타는 칸에 타던데, 그분이 바로 옆에 앉는 날은 잠은 다 잔 거예요. 어찌나 요란하게 화장을 하는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파우더를 하도 팡팡 세게 두드려서 제가 ‘팡팡녀’라고 별명도 붙였다니까요. 또 그때마다 저를 툭툭 건드리는데, 화장하는 데 집중해서 그러는지도 모르나 봐요.”
출근길에 화장하는 ‘그녀’ 때문에 괴로운 사람이 또 있다. 금융권의 L 씨(32)는 좁은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성들이 있으면 되도록 다른 칸으로 옮긴다. 여름에는 안 그래도 여러 냄새가 섞여서 괴로운데 화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냄새 때문에 더욱 힘들단다.
“지하철 화장 때문에 정말 화가 난 적이 있어요. 옆자리에 앉은 분이 작은 가방을 꺼내서 화장을 하는데 냄새까지는 참았는데, 붓으로 파우더를 얼굴에 칠할 때 가루가 여기저기 날리지 뭡니까. 짙은 색 정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가루가 저한테까지 올까봐 불안했습니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바라고 있다가 인파를 헤치고 내려서 한숨 돌렸습니다. 그 후에 꼼꼼히 확인해 보니까 정장 여기저기에 화장품 가루들이 묻어있는 거예요. 순간 짜증이 나더라고요. 털면 더 번지기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도 화장하는 분을 만나면 바로 일어납니다.”
대중교통에서 화장하는 직장인을 곱지 않은 시선보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조금은 너그러운 편이다. 생활용품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29)는 같은 여자지만 ‘노 메이크업’으로 지하철을 탔다가 ‘풀 메이크업’을 하고 나가는 여성분을 보면 그저 신기하다고.
“화장이 익숙지 않아서 제가 하면 별로 맘에 안 들어요. 아무래도 잘 안하게 되죠. 그래서 가끔 지하철에서 베이스부터 색조까지 완벽하게 해결하는 분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에요. 움직이는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내리는 모습을 보면 눈이 동그래져요. 그 조그만 가방에 풀 세트를 다 넣고 있는 것도, 밋밋했던 눈이 깊고 그윽해지는 것도 다 신기해요. 화장품은 뭘 쓰나 궁금하기도 해서 넋 놓고 바라보다가 화장하던 분과 눈이 마주친 적도 있다니까요.”
화장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 ‘기술력’ 하나만은 인정한다는 직장인도 있다. IT업계 종사자 S 씨(28)는 최근 요새 시쳇말로 ‘출근길 화장 종결자’를 목격했다. 버스에 앉아서 창밖을 보는데 한 손으로 핸들, 한 손으로 화장을 하는 여성 운전자를 봤단다.
“화장을 하는 상태에서 신호가 바뀌었는데 차가 전진을 하더라고요. 너무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서도 대단했어요. 버스 타고 가다 보면 그런 대단한 분을 여럿 봅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과속 방지턱을 넘어갈 때도 그 넘어가는 순간의 리듬을 타면서까지 화장을 하는 분도 있어요. 얼마나 연습했을까 싶더라고요.”
보는 눈도 많고 눈치도 보이는데 굳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화장을 해야 하는 여성들도 할 말은 있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J 씨(여·30)는 회사가 너무 멀어 어쩔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회사에 지각하지 않고 좀 여유 있게 도착하려면 새벽 5시에는 일어나서 준비해야 합니다. 남들처럼 집에서 완벽하게 꾸미고 나가고 싶은데 그 시간에 일어나서 씻고 나가는 것도 사실 벅차요. 이른 아침에 거의 아무도 없는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사람들 많아지기 전에 후다닥 끝내려고 하는 편이죠.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데도 게을러서 밖에서 화장한다고 하면 속상해요.”
의류회사에 다니는 K 씨(여·32)도 출근길에 화장하는 것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것 같아 씁쓸할 때가 있단다.
“가끔은 좀 더 자고 싶을 때도 있고, 아침에 가족들 챙기다 보면 잠깐이라도 화장하는 시간을 갖는 게 어려워요. 그냥 좀 피곤했나보다 하고 넘어가주면 좋겠는데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 그래서 되도록 집에서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몇 십분 일찍 준비하는 게 맘처럼 쉽지는 않네요.”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H 씨(여·26)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화장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한번 제대로 민망한 일을 겪으면 다시는 안하게 될 거라고 못 박았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다 사무실 직장동료를 만났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만날까봐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쪽 출입구는 멀리 피해서 앉거든요. 그날도 화장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얼굴을 들고 대각선 쪽을 보니까 같은 사무실 신입 남자 직원이 앉아 있더라고요. 딱 눈이 마주쳤는데 정말 민망했어요. 늘 화장을 한 상태에서 보던 직원이고 아직은 사무실 여직원들한테 환상이 있는 신입이라 항상 양껏 꾸미고 상냥한 얼굴로 대해왔거든요. 사무실 들어가서도 제대로 인사 못하겠더라고요.”
출근길 화장에 대한 찬반논란에서 반대 의견이 여전히 많은 편이다.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며 이해하는 이보다는 꼼꼼하지 않아 보이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목소리가 우세하다. 이를 감안한다면, 많은 세상 일이 그렇듯이 출근길 화장도 ‘피치 못할 경우, 적당한 선에서 간단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