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에 관한 입장을 발표한 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포옹을 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정치권을 넘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안철수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다. 출마선언 전부터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한 안 원장은 본업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지만 그의 정치 행보는 이제 시작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안 원장의 정치실험은 6일 만에 일단 막을 내렸지만 나라를 홀딱 뒤집어놓은 ‘안풍’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분위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안철수 신드롬’의 허상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번 사태를 빌미로 그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얘기도 속속 나오고 있다.
안 원장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8년이다. 의사 신분으로 백신을 개발해 수많은 PC 바이러스를 퇴치했던 그는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도 그는 의사-벤처기업 사장-유학생-교수로 수차례 직함을 바꿔가며 20년 이상 뉴스메이커로 회자돼 왔다. 서울대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한 그는 7년간 의사와 백신개발자로 이중생활을 하던 끝에 1995년 의사의 삶을 포기하고 벤처기업인으로 변신했다.
안철수 연구소를 한국 최고의 안티바이러스 기업으로 성장시켜놓은 그는 또다시 새로운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005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그는 홀연 유학길에 올랐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MBA과정을 마친 후 2007년 귀국해 KAIST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일확천금을 향한 벤처붐이 일던 시기에도 그는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투명경영을 펼쳐 귀감을 샀으며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도 눈을 돌렸다.
일례로 연구소를 1000만 달러에 넘기라는 글로벌 기업의 제안을 뿌리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외국 기업에 연구소를 넘기면 직원들은 실업자가 되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비싼 값에 백신을 구입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양한 이력에 더해 그가 일관되게 보여준 순수하고 반듯한 이미지는 신드롬의 기반이 됐다. 아랫사람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으며 술·담배도 하지 않는다는 그는 학창시절 가장 큰 일탈이 선생님을 속이고 극장에 갔던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그는 새벽 3시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의 삶은 ‘도덕 교과서’처럼 재미없어 보였지만 이는 국민들에게 “안철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이름”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그의 가장 큰 경쟁력은 ‘감동’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미국 오바마 정권 출범에서 드러났듯 현대 정치의 화두는 단연 ‘감동’이다. 의사를 포기하고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길을 택했던 그의 도전은 모험이었지만 그의 성공스토리는 더욱 빛을 발했다. 특히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백신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 나눔을 실천했다.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왔다는 점도 신드롬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키워드는 ‘정의’와 ‘소통’이다. 즉 ‘안철수 신드롬’ 기조에는 사리사욕에 급급해 국민의 절규에 귀를 막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강한 경고의 메시지가 투영돼 있다. 안 원장이 그동안 재벌과 권력이 주도하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공멸하지 않기 위한 해법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철수 신드롬’을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과대평가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일부는 안 원장이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스펙을 쌓으며 성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의사라는 본직을 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는 삶은 생계에 허덕거리는 이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로 그의 태생적 배경과 훌륭한 스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탄탄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녀의 성공에 사활을 거는 강남엄마들 사이에서 안 원장이 ‘강남키즈’의 로망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60년대 ‘강남키즈’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최고의 스펙을 달성했는데 기득권자인 그가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소외계층을 얼마나 이해하며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번 서울시장 출마설 해프닝을 거치면서 안 원장이 숨겨진 정치적 야심을 드러냈다는 시각도 있다. 이미 그는 정치판에 뛰어든 것과 다름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그가 유학길에 올랐을 때부터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정치를 위한 세팅작업이 오래전에 시작됐다는 얘기다. 핵심은 그간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인지도를 높여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최근 안 원장의 미디어 노출이 부쩍 잦아진 것을 사실상의 정치행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안 원장의 <무릎팍 도사> 출연은 신선하기도 했지만 많은 의구심을 남겼다. 또 ‘청춘콘서트’에서 안 원장은 기업과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하며 지지층을 늘렸다. 안 원장은 암울한 청춘들과 소통하며 사회정의를 외쳤는데 이는 분명 이전과 다른 행보였다. 따라서 이번에 안 원장이 ‘한나라당 응징’을 선언하며 정치색을 커밍아웃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성역과 같은 존재였던 안 원장을 비판하는 이들이 등장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안 원장의 기업적·사회적 업적이 실제로는 미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안 원장이 만든 V3가 세계적인 보안 프로그램이라도 되는가”라고 꼬집었다. 모든 것이 부풀려졌다는 얘기다. 글로벌 보안기업으로의 도약을 말했지만 간신히 국내보안업체 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수준으로 국제경쟁력이 전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일부는 안 원장이 의학·공학·경영학까지 섭렵했지만 특정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특히 안 원장이 중소벤처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척하면서도 핵심사안은 피해가며 유독 대기업에 대한 비판으로 여론에 편승해왔으며 민감한 주요 현안에는 침묵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안 원장을 둘러싼 비판의 핵심은 그가 진정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인물이냐는 것이다. 고도의 독자적인 전문성이 요구되는 정치판에 정치적 DNA가 풍족하지 않은 안 원장을 들이기에는 불안하다는 노파심이다. 안 원장이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갖추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판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얘기다.
어쨌거나 안 원장에게 이번 이벤트는 대성공이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이번 해프닝으로 인해 명분과 이미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안 원장은 경쟁력 있는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한 상태다. 그가 비록 서울시장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안철수 신드롬’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같은 맥락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정계·학계·연예계 빵빵
▲ 왼쪽부터 조국 교수, 박경철 원장 |
안 원장은 언론을 통해 “내 멘토만 300명”이라 언급한 바 있다. 우선 박원순 변호사를 들 수 있다. 안 원장은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할 만큼 그와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청춘콘서트’를 함께하고 있는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원장과는 깊은 고민도 함께 나누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청춘콘서트를 기획한 평화재단 이사장인 법륜스님과도 친분이 있다. 평화재단에는 김홍신 전 한나라당 의원, 백승주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권영경 통일교육원 교수 등이 이사로 재직 중이다.
한나라당 출신의 전략가 윤여준 평화교육원 원장은 애초 안 원장의 정치멘토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윤 원장과의 관계로 뒷말이 많자 안 원장은 직접 “저는 그 분이 멘토라고 얘기한 적 없다. 윤여준 씨가 청춘콘서트의 기획자라는 것은 오보다. 윤 씨는 청춘콘서트 게스트 중의 한 분”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강연 게스트로 인연을 맺은 이들도 많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최상용 전 주일대사, 조국 서울대 교수, 박웅현 TBWA 코리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안 씨는 방송인 김제동 씨와 배우 김여진 씨도 멘토로 언급했다.
또 드러나지 않았지만 카이스트와 서울대 등 학계에서 맺은 인맥들도 다수 포진해 있으며, 그의 부인 김미경 교수를 통한 인맥도 만만찮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향]
왔다가 사라지는…바람?
‘안철수 신드롬’을 경계하는 이들은 그가 지적했던 한국사회의 병폐를 고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회의감을 나타냈다. 실제로 대중적 인기를 발판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인물들은 꽤 있었다. 돌풍을 일으킨 인재들이 정치판 불나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국민들은 수차례 목격해왔다.
지난 대선 때 공존담론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문국현 유한킴벌리 전 사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쓰라린 실패는 “대한민국은 유한킴벌리가 아니다”라는 뼈아픈 교훈을 안겨줬다.
‘무균질’ 정치를 내세웠던 박찬종 변호사도 비운의 정치인으로 각인됐다. 정치개혁을 피력하며 유권자를 사로잡았던 그는 선거 직전까지 지지도 1위를 내놓지 않았지만 DJP 연대와 그의 유신 지지 발언 등이 겹치면서 조순 민주당 후보에게 서울시장직을 내줘야 했다.
2002년 후보단일화로 주저앉은 정몽준 의원은 “정치적, 제도적 기반이 없는 대중적 인기는 신기루”라며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제가 누린 대중적 인기도 ‘신드롬 현상’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MIT에서 최단기로 박사학위를 따낸 그는 정치권에 영입됐지만 초라하게 정계를 은퇴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