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야권 대통합 추진모임 ‘혁신과 통합’ 발족식. 왼쪽부터 한명숙 전 총리, 유시민 대표, 손학규 대표, 문재인 이사장, 이해찬 전 총리.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그렇다면 ‘안-박 신드롬’이 가져올 야권과 민주당의 가장 중대한 변화는 뭘까. 불분명한 정체성, 미약한 수준의 정당 민주주의, 여권에 비해 열등한 정책 능력, 청산하지 못한 패거리 정치 문화 등 민주당이 고쳐나가야 할 문제점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무시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춘 비 호남권 리더들의 잇단 등장으로 야권과 민주당의 탈 호남화가 이뤄질지 여부다. 민주당 안팎에선 “‘안철수·박원순 바람’은 ‘손학규·문재인 바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안-박 신드롬’이 야권과 민주당의 탈 호남화라는 도도한 흐름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는 주요 원인은 두 사람이 추구하는 정당이 범야권 대통합 정당이라는 데 있다. 두 사람 모두 현재의 민주당에 입당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시장 보선에 기호2번(민주당)으로 출마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입당 불가’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연합정당론, 빅 텐트론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제3지대 창당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민주당에 ‘새 피’로 수혈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야권의 질서를 짜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 새로운 질서의 한가운데에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목표가 들어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진보 시민사회 진영과 정치권 밖 친노그룹 등이 결합한 범야권 대통합 추진기구 ‘혁신과 통합’이 제안한 바 있는 ‘제3지대 창당론’ 역시 진보 정체성 강화, 정당 민주주의 강화 등 여러 가치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역시 탈 호남화다. 민주당의 호남 세력과 부산·경남(PK)의 친노·개혁 세력, 여기에 수도권 등의 진보 세력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987년 ‘양김’(김영삼(YS)-김대중(DJ)) 분열로 흩어졌던 영·호남 민주개혁 세력이 재결합하고 여기에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진보 세력을 합쳐 범민주·진보·개혁연합을 이루자는 구상이다. 이것은 범민주·진보·개혁연합 구성이라는 과제를 더 이상 민주당에 맡겨둘 수 없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민주당이 그동안 이른바 ‘동진정책’을 통해 끊임없이 영남권 공략을 시도해 왔지만 스스로 호남당 이미지를 깨뜨리지 못한 탓에 번번이 실패해 왔다. 실제로 비호남 세력을 상당 부분 끌어들였던 열린우리당을 거쳤음에도 현재의 민주당은 공직후보 및 당 지도부 경선 때 당원보정을 해야 할 정도로 호남 편중이 심한 상태다.
그렇다면 왜 탈 호남화인가. 무엇보다도 탈 호남화는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까지 영·호남으로 편 갈라 싸워 온 이른바 ‘1987년 체제’를 깨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대변되는 지역주의 정치구도는 한국 정치 발전을 가로막아 온 중대 장애물인 동시에 정치의 생산성까지 떨어뜨렸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지역주의 정치구도 하에서는 누가 훌륭한 인물인지, 어느 당의 정책이 더 훌륭한지는 국민들의 선택에서 후순위로 밀렸다. 민주당 후보는 호남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영남에서 그야말로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돼 왔다. 국회도 생산적인 민의의 전당과 한참 거리가 먼 정쟁의 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보다 가깝게는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회권력을 교체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도 탈 호남화는 필수적이다. 범야권 대통합 정당 건설을 통해 탈 호남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그 자체로 한나라당과의 1 대 1 대결구도가 펼쳐지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동시에 한나라당을 보수세가 강한 대구·경북 중심으로 포위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이런 점에서 야권의 탈 호남화가 반드시 넘어야 할 중대 고비는 ‘호남 소외론’이다. 지난 2002년 광주 경선의 드라마를 통해 대통령에까지 오른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지역주의 정치구도 극복에는 실패했고, 그 시발점은 ‘호남 소외론’이었다. 노무현 정부 초기 인사 과정에서 불기 시작한 ‘호남 소외론’은 대북송금 특검의 칼끝이 DJ와 그 측근들을 향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해 호남 후보도 버리고 영남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는 연일 호남지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대선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를 지지하며 ‘노무현 흔들기’에 동참했던 일부 호남 정치인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호남 소외론’을 악용하면서 결국 새천년민주당은 둘로 쪼개지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넘어야 할 산이 만만찮지만 현재의 정치 환경은 범야권의 탈 호남화에 유리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선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범야권 전체적으로 정권교체가 최우선 목표로 인식되고 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등이 민주당과의 통합에는 반대하면서도 선거연합(후보단일화)에는 적극적인 게 단적인 증거다. 한나라당과의 1 대 1 대결구도를 만드는 대열에서 빠지는 것은 어느 정당, 어느 지역민에게도 엄청난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범야권을 이끄는 ‘간판’들의 면면도 탈 호남화에 부합한다. ‘혁신과 통합’을 주도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의 동참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범야권 대통합이 이뤄지지 않은 채로 2013년을 맞이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때 민주당을 누가 이끌고 있을까. 서울에 이인영과 우상호, 인천 송영길, 강원 이광재, 충청 안희정, 경남 김두관…. 그때 누가 감히 민주당을 호남당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차지할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부산 출신의 안철수 원장,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조국 서울대 교수, 경남 출신의 박원순 변호사, 경북 출신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까지 더하면 이 관계자의 말이 허언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호남지역 현역 정치인에 대한 평가도 싸늘하다. 정동영 정세균 등 호남 출신 대선주자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의미 있는 지지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 호남 지역 현역 국회의원들 역시 “3분의 2 이상이 물갈이돼야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이다.
사실 호남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2004년 총선 열린우리당 압승 과정에서 확인된 것처럼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략적 선택을 보여줘 왔다. 따라서 범야권의 탈 호남화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은 얼마나 이른 시기에, 얼마나 강력한 대통합 정당을 무리 없이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범야권 대통합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민주당 관계자는 “호남의 선택은 거의 예외 없이 대의를 좇아왔다”면서 “범야권 대통합 운동이 호남을 비롯해 전통적 지지층의 마음속에서 헤게모니(주도권)를 장악한다면 어떠한 기득권 지키기, 어떠한 편 가르기 시도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