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성격 좋은 선수다. 서른세 살의 베테랑 선수임에도, 선발투수임에도, 감독이 지시하든, 자청하든 불펜을 오락가락하면서 팀의 위기를 틀어막는다. 올 시즌 28경기에나 출장했다. 팀 내 불펜 투수들을 제쳐놓고 선발진 가운데 가장 많은 출장 숫자다. 만약 선발로만 뛰었다면 그의 ‘평생’ 소원인 두 자릿수 승수를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KIA 타이거즈 서재응(33). ‘나이스 가이’ ‘응원단장’이란 수식어가 뒤따르는 그한테 조범현 감독은 ‘10승을 못해도 이룬 거나 마찬가지의 활약’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개인 성적이 좋든 나쁘든, 팀을 위해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베테랑 선수의 자세에 흠뻑 매료된 것. 선수단은 물론 팬들까지도 서재응의 마음 씀씀이에 박수를 보낼 정도다. 정규시즌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포스트 시즌을 준비 중인 서재응과 오랜만에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부분이지만, 그는 정말 달변가다.
# 내가 ‘애니콜’이 된 이유
“솔직히 선발투수가 불펜을 오가는 일이 좋은 현상은 아니다. 시즌 초부터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 보니, 고참 선수로서 팀이 힘들 때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돌이켜 보면 4월이 가장 아쉽다. 2~3점 차이가 날 땐 어느 정도 던졌는데 동점이거나 1점차에선 쉽게 무너졌다. 그런 미안한 마음에 불펜 투입 요구를 받아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 10승에 목매는 이유
“사람들은 서재응이란 야구 선수가 지금까지 10승을 못했다면, ‘어이, 장난해?’라는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때 투수로 전환한 후 지금까지 내 야구 인생에 ‘10’이란 숫자가 찍힌 적이 없다. 고등학교, 대학교, 메이저리그, 한국 프로야구, 통틀어 10승을 올리지 못했다. 2003년 뉴욕 메츠 때 9승 이후 10승할 기회도 있었고, 지난해에도 또 그 기회가 눈 앞에 있었다. 그런데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올해도 8승까지 꾸역꾸역 가면서도 그 후론 쉽지가 않다. 이게 내 복인가 싶다.”
# 그래도 난 운 좋은 남자
“그런데 10승을 올리지 못해도 난 운 좋게 잘 풀린 케이스다. 별 볼 일 없다가도 중요한 시기 때마다 한 번씩 빵빵 터트려줬다. 미국 스카우트들이 와서 집중해 볼 때는 94마일, 95마일씩 던졌다. 그들이 탐을 안내려야 안 낼 수가 없을 정도로(웃음). 그런 운들이 작용해 지금까지 야구하는 것 같다.”
# 야구인생의 전환기
“난 고등학교 2학년 때 투수로 전업했다. 나 스스로 야구에 대한 소질이 별로 없다고 느끼고 있던 시기에 지금 인하대 감독님이신 허세환 감독님이 날 투수로 올린 것이다. 당시 1학년이었던 (김)병현이랑 3학년 선배가 광주일고 에이스였다. 중요 대회 때는 주로 두 사람이 마운드에 오르고, 지방대회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할 때 내가 등판했다. 그런데 그 선배가 가정 문제로 인해 야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허 감독님은 팀 상황이 그렇다보니 날 계속 내보낼 수밖에 없으셨다. 만약 그 선배가 존재했더라면 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발투수가 2명밖에 없다 보니 감독님께서도 날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 병현이 넘어서고 싶었지만…
“고3 올라가면서 볼에 힘이 붙었고 스피드가 나오기 시작했다. 병현이의 1년 선배라 팀 에이스 역할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병현이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나보단 병현이가 한 수 위였다. 그걸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고 나서 병현이의 어떤 부분을 가져와야 내가 이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병현이의 마운드에서 자신감 있는 피칭이 부러웠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내색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그걸 배웠다. 또 나의 베프인 두산의 (김)선우한테선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여유를 닮고 싶었다. 내가 컨트롤 능력을 상실했을 때 서두르는 습관이 있다. 이걸 고치려고 선우가 투구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되풀이해서 보고 또 봤다. 지금은 많이 ‘선우스러워졌다’.”
# 개성 강한 3인방
“선우랑 병현이, 그리고 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봤을 땐 쉽게 연결이 안 될 것이다. 워낙 개성이 강한 선수들이고 스타일이 달라 서로 좋아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런데 우린 너무 잘 뭉쳐 다녔다. 셋이 친하게 된 것은 서로를 배려하고 감싸는 이해심 때문이다. 내가 선우를 배려하면, 선우는 병현이를, 그리고 병현이는 나를…, 이런 식으로 감싸 안았다. 가장 편하고,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친구이고 후배다. 특히 병현이는 생각이 깊고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무슨 문제가 생기겠다 싶으면 혼자 감수하려는 친구다. 가끔은 병현이가 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웃음).”
# 내가 SK를 싫어한다고?
▲ 지난 6월 14일 한화의 경기에 앞서 서재응이 양현종의 시물레이션 피칭을 돕고 있다. 아래 사진은 2010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참석한 서재응과 이만수 코치.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
# 베테랑 투수의 생존비법
“전성기 때의 투구폼과 지금의 투구폼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지금은 나이가 어렸을 때 구사했던 상체 위주의 힘쓰는 피칭을 할 수 없게 됐다. 몸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변화구 위주의 하체를 이용하는 피칭을 하면서 앞으로 내가 어떤 투구폼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이전 뉴욕 메츠 시절, 피터슨 코치가 생각난다. 당시 그 코치가 나한테 요구했던 부분은 지금의 이런 투구폼이었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하기 싫었다. 나이도 젊었고, 충분히 잘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면서 피터슨 코치와 불화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코치가 왜 나한테 투구폼을 바꾸라고 요구했는지, 제대로 느끼고 있다. 그 분은 내가 야구선수로서 롱런하길 바랐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했던 건데, 내가 그걸 오해했던 것이다. 만약 그 코치의 조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팔꿈치 통증으로 고생하지도 않았다.”
# 떠올리기 싫은 슬럼프
“뉴욕 메츠 입단 후 2002년은 나한테 최악의 한 해였다. 악재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내 투구폼조차 ‘이게 진짜 맞는 폼인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혼란스러웠다. 제구가 무너지고, 자신감이 땅에 떨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자,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구단에 부탁을 해서 한 달간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에 몸을 담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만났던 코치들이 굉장히 열정적으로 날 가르쳤다. 꾸준히 선발로 내보내면서 실전에서의 날 테스트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수정 보완시켜줬다. 그렇게 보낸 한 달이 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르게 했다. 날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결국 2003년에는 9승을 올릴 수 있었다.”
# 내 사랑 ‘써니’와 술
“올 시즌을 앞두고 나랑 이혜천과 선우가 내기를 한 게 있다. 셋 중 10승을 먼저 한 사람한테 못한 두 사람이 술 사주기였다. 10승을 먼저 챙긴 선우가 요즘 자꾸 채근을 한다. 언제 술 사줄 거냐면서. 지금은 선우랑 만나 밥 먹고 차 마신 후 헤어지는 ‘건전한’ 방법을 택하지만, 옛날에는 만나기만 하면 술을 퍼 마셨다. 둘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선우가 선발투수처럼 첫 판에 분위기를 달구고, 내가 마무리 투수마냥 마지막에 달린다. ‘적당히’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그런 문화가 힘들어지더라. 선우는 술을 마셔도 3년 연속 10승을 하지만, 난 같이 마시는데 아직까지 10승을 거두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손해 본 것 같다(웃음).”
# 김진우에 대한 아픔
“2006년 플로리다로 전지훈련을 온 KIA 타이거즈 선수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진우의 피칭을 보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직구랑 변화구가 장난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선동열 감독님을 능가하는 투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선수들한테서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은 사생활 문제로 야구를 떠나는 사건도 생겨났다. 지금은 어렵게 재기했고, 재기한 이후에도 진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신뢰면에서 100%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난 진우를 믿는다. 진우가 이전의 투구폼을 되찾고, 자신의 잠재된 실력을 마운드에서 올곧이 끄집어낸다면, 그는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KIA가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나고 싶은 팀은 롯데겠지만, 서재응이 잘하는 모습을 보시려면 SK가 올라오길 간절히 바라야 한다(웃음). 그리고 서재응이 빨리 은퇴하길 바란다면, 가급적 이른 시간에 10승을 달성하길 기도해줘라. 은퇴 전에 이 ‘10’이란 숫자는 꼭 찍고 싶으니까. 그래야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 같다.”
광주=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