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28일 범야권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야 4당, 시민사회 협약식’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왼쪽)와 박원순 시민사회 후보(오른쪽)가 자리에 앉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날 소동의 원인은 범야권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단일화 논의에 민주당이 어떤 원칙을 갖고 임할지를 두고 논란이 빚어진 데 있었다. 외견상 협상전략을 둘러싼 이견 표출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언쟁 당사자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오고 간 말들 속에는 서울시장 보선 수준이 아니라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범야권이 추진 중인 대통합 구상이 좌초될 수도 있는 불씨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시작은 박주선 최고위원의 발언이었다. 박 최고위원은 기자들이 배석한 상태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시민후보로 출마선언을 한 박원순 변호사를 겨냥, “(범야권 후보단일화 경선에서) 만일 무소속 후보가 되더라도 즉시 입당해서 민주당 후보로 등록한다는 전제가 없으면 무소속과의 단일화 후보 경선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후보가 서울시장 후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친다”며 “민주당 후보가 서울시장 후보로 등록조차 못하는 상황은 민주당의 소멸이고 존재감의 상실”이라고도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통합은 당 대 당이 하는 작업이기에 야권의 정당이 통합 대상이지 일부의 사람이나 단체는 통합대상이 아니다. 그분들은 입당이나 영입의 대상이다. 만일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방법의 통합 절차로 진행이 된다면 민주당은 완전히 주도권을 잃고 흡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 불 보듯 뻔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정치권 밖 친노(친노무현) 세력, 진보 시민사회 세력 등과의 범야권 대통합 정당 추진과 관련해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비공개 회의로 전환된 즉시 범야권 통합 협상을 전담하고 있는 이인영 최고위원이 “후보단일화도 통합도 하지 말라는 얘기냐”며 정면으로 들이받았고 참석자들 간에 설전이 오갔다. 이날 회의는 결국 “이견이 있는 사안은 비공개 회의 때 얘기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대표 말이 우습게 들리느냐”는 손학규 대표의 호통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이날 언쟁은 범야권 통합에 대한 민주당내 비주류와 호남지역 정치인들의 정서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손학규 대표와 이인영 최고위원 등 주류가 범야권 통합에 목을 매고 있는 것과 달리 당내의 상당한 세력이 이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거부감의 원천은 통합 과정에서 민주당과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기득권 세력’ ‘물갈이 대상’ ‘개혁 대상’으로 몰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통합 포비아(공포증)’라고도 부를 만한 위기감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뼈아픈 경험에 근거한다. 현재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인 대부분이 지난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가해자 혹은 피해자였던 것이다.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으로 대표되는 당시 열린우리당 창당파는 “2002년 대선 승리는 민주당의 승리가 아닌 국민의 승리다. 건강한 진보·개혁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호남당’을 넘어 외연을 확대하고 당권을 국민들에게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정치개혁 주장이 국민 여론 속에 세를 형성하면서 박상천·정균환·유용태 등 구당파는 자연스럽게 ‘기득권 세력’ ‘물갈이 대상’으로 찍혔다.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는 “유혈낭자하게 노선 투쟁을 벌여보자”는 신기남 전 의원의 발언이나 이른바 ‘이미경 의원 머리채 사건(구당파측 당원이 당무회의에 참석한 이 의원의 머리채를 잡아챈 사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두 당으로 쪼개졌던 사람들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민주당 그늘 아래로 모였지만 이제 이들 모두가 당 밖 세력에 의해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몰릴 처지가 됐다. 범야권 대통합이라는 대명제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민주당 내 많은 정치인들이 ‘대통합=물갈이’로 인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통합 포비아’는 현역 국회의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내년 총선에서 호남지역 출마를 준비 중인 한 전직 당직자는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범야권 대통합 협상은 필연적으로 ‘총선 공천 지분 나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오랫동안 표밭을 가꿔온 민주당 사람들이 한방에 날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수도권의 한 원외 지역위원장도 “기득권 포기야 다들 각오하고 있지만 기존 민주당 사람들에겐 경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타 정당에게 ‘권역별로 몇%’ 식으로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밑바닥부터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모든 후보들이 ‘민주당의 자존심’을 핵심 구호로 내걸었던 것도 통합의 주도권은 민주당이 쥐어야 한다는 정서를 반영한다. 경선에 나섰던 천정배 의원은 단적으로 박원순 변호사를 향해 “민주당 한 게 죄냐”고 쏘아붙여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
민주당의 통합 대상인 타 정당 및 세력들은 범야권 대통합의 전제조건으로 민주당의 기득권 포기를 내걸고 있다. 이들에게나 민주당에게나 통합의 주도권은 ‘빼앗기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금과옥조인 셈이다. 이를 둘러싼 기싸움이 범야권 대통합 성사 여부를 가를 시금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