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6일 국회 로텐다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를 돕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참여정부 시절 치러진 재·보선에서 ‘0 대 48’이라는 스코어로 참패해 ‘박근혜 트라우마(정신적 충격)’를 갖고 있는 야권 역시 문재인·손학규·안철수 등 유력 차기 주자들이 총출동할 가능성이 높아 이번 보궐선거는 사실상 대선의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박 전 대표가 이번 10·26 보궐선거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내막을 따라가 봤다.
“안철수, 문재인 다 나와도 이긴다.”
지난 10월 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의 캠프 출정식에서 만난 한 친박 관계자는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표의 결단이 당을 하나로 만들었고, 승산이 낮았던 재보선에서 희망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박 전 대표가 “한국 정치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궐선거 지원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힌 이후 고무된 나 후보 캠프 분위기를 반영하는 듯했다.
나 후보 역시 선대위 발족 선언문 낭독 직전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박 전 대표가 직접 전화를 걸어 주셨다”고 말했다. 나 후보는 계파를 초월한 선대위를 꾸린 데 이어 박 전 대표까지 가세함으로써 불리했던 판세를 만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나 후보 캠프엔 권영세(선대위원장)·이성헌(총괄본부장) 의원 등 상당수 친박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지원에 나섬에 따라 서울시장을 포함한 이번 보궐선거의 ‘판’도 커졌다. 특히 ‘신드롬’을 일으키며 박 전 대표와 지지율 1위를 다투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의 거취가 최고 관심사로 떠올랐다. 안 원장이 야권 통합후보인 박원순 변호사를 도울 경우 서울시장 선거는 ‘나경원-박원순’이 아닌 ‘박근혜-안철수’의 싸움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박 전 대표는 “대선과는 관계가 없는 선거”라며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본인이 의도했건 아니건 유력한 차기 후보인 박 전 대표가 참여한 이상 예비 대선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진 않을 것이다. 선대위 직책도 맡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안다”면서 “그러나 박 전 대표 스탠스가 변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선거는 지도부에 맡겨야 한다는 원칙을 깬 것은 최근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박 전 대표가 대권전략을 수정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박 전 대표는 내년 총선 전후에 본격적인 대권 활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철수 원장의 급부상으로 ‘대세론’이 위협받자 그 시기를 앞당길 필요성이 제기됐고, 최근엔 12월에 대선 캠프를 꾸리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당 지도부가 10·26 보궐선거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이겨야 본전’이라고 판단한 친박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 친박 의원은 “한나라당이 ‘박근혜 마케팅’을 하겠다는 것인데, 지면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묻겠느냐”고 되물었다.
이러한 기류에 변화가 생긴 것은 지난 10월 3일 열린 야권 통합후보 국민참여경선 직후다. 예상 밖 흥행을 기록하며 박원순 변호사가 박영선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누르자 친박 일각에서 당의 구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됐다. 이번 보궐선거를 외면할 경우 승패를 떠나 당내 입지가 약화되는 것은 물론 박 전 대표 최대 지지기반인 보수층이 이탈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의 한 교수는 “오세훈 시장의 사퇴가 아니었다면 박 전 대표가 나서지 않아도 될 소규모 선거였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설령 선거에 져 ‘책임론’에 직면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원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더 크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오른쪽)와 박원순 범야권 단일후보가 지난 4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희망의 나눔 걷기’ 행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당시 이 자리에 참여했던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선거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기존 입장을 확인하고, 박 전 대표에게 이러한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비슷한 무렵, 핵심 참모들 역시 여의도 모처에서 회동을 갖고 박 전 대표의 ‘행동 개시’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대표의 선거 지원 여부를 놓고 친박 진영 간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다. 결국 박 전 대표가 다음 날 선거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참모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됐다.
보좌진들이 선거 패배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박 전 대표의 선거 지원을 밀어붙였던 것은 우선 앞서 언급한 대로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당의 어려움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 당위론에 근거한다. 또한 나경원 후보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동안에 박원순 변호사 지지율이 하락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에도 주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표 자문교수는 “친박 측은 나 후보가 박원순 변호사랑 붙으면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박영선 정책위의장이 나왔다면 아마 박 전 대표가 더욱 장고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 후보가 박 변호사에 비해 더블스코어로 뒤지고 있다가 최근 한 자릿수로 좁히지 않았느냐. 본격 선거전이 시작되면 그 격차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이라면서 “참모들의 이러한 정치적 분석과 여론조사 결과가 박 전 대표의 ‘결단’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특히 참모들 사이에선 박 전 대표의 ‘카운터 파트너’로 안철수 원장이 출전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류도 감지된다. 현재 안 원장은 공식적인 입장은 표명하지 않고 있지만 선거 중반 이후 박 변호사를 지원사격할 것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안철수-박근혜’의 대결로 비춰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친박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친박 의원의 한 보좌관은 “서울시장처럼 큰 선거는 어차피 조직 싸움이다. ‘안풍’보단 ‘박풍’이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면서 “안 원장의 급부상으로 당황한 박 전 대표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안 원장이 아무리 지지율이 높더라도 선거는 박 전 대표 주특기 아닌가”라고 말했다. 적어도 선거에서만큼은 박 전 대표의 ‘노하우’가 안 원장의 ‘인기’를 누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모들의 판단을 놓고 친박 의원들 중 일부는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며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다. 불리한 판세로 시작하는 마당에 안 원장까지 박 변호사를 지지한다면 아무리 박 전 대표라도 ‘역전’시키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오히려 ‘불패신화’를 자랑하던 박 전 대표의 명성에 금이 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참모진들은 “박 전 대표 말처럼 서울시장에만 ‘올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박 전 대표는 전국 선거구를 돌 것이다. 안철수뿐 아니라 문재인 손학규 등을 모두 상대한다는 뜻”이라면서 “이기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더라도 그 타격은 적을 것이다. 오히려 여권에서 박 전 대표의 위상은 공고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결국 이번 선거는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어떠한 득표력을 보이느냐가 관전 포인트다. 특히 ‘안철수-박원순’ 조합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박 전 대표도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