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기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승리로 이끈 1등 공신이요,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집권당 대표로 발돋움했건만 최근 들어 당 내외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북 송금 특검법안을 놓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가 묵살당하는 ‘망신’에도, 4·24재보선에서는 민주당 후보 전원이 낙선하는 사상초유의 참패를 기록했을 때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정 대표지만 요즘 당내외에서 돌출하는 ‘악재’들에는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 민주당 정대철 대표 | ||
이 과정에서 구주류는 물론 신주류 내에서조차 강경파를 중심으로 정 대표의 정치력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함께 ‘지도부 일괄사퇴’를 주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 정 대표의 고민을 깊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에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총재(JP) 등과 함께 청와대 3당 대표 초청 만찬 후 서울 강남의 호화 룸살롱인 ‘지안’에서 뒤풀이를 가진 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는 등 ‘주화’(酒禍)를 겪었다.
사실 이날 술자리는 정 대표가 서울 인사동의 M 한정식집을 뒤풀이 장소로 제안했으나 박 대표가 “오늘은 노래 한번 부르자”고 하고, 이에 JP가 “내가 아는 곳에 가 한잔 사겠다”고 해 장소가 결정된 것.
정 대표는 특히 호스트를 자청한 JP가 만취하는 바람에 술값까지 대신 내는 불운(?)을 겪기도. 일부 언론은 한발 더 나아가 정 대표가 ‘룸살롱 뒤풀이’ 이튿날인 5월22일 강남의 한 룸 카페에서 모 방송 고위 관계자들과 술을 마신 사실까지 보도하며 궁지에 몰았고, 정 대표는 결국 5월26일 당 공식회의 석상에서 공개사과하는 곤욕을 치렀다.
먼저 신당 문제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분당 위기’로까지 치달으면서 정 대표의 입장은 갈수록 곤궁해지고 있다. 한때 당 소속 의원 3분의 2가 신당추진 모임에 참여할 만큼 대세를 이룬 듯했던 ‘신당 불가피론’이 신주류 강경파들의 ‘돌출 발언’과 이를 문제 삼은 구주류측의 대대적인 역공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
특히 구주류측이 조직적 저항을 펼치면서 신주류측이 추진중인 신당추진기구안의 당무회의 상정이 열흘 가까이 미뤄지다 겨우 이뤄지는 등 신당 추진력이 눈에 띄게 탄력을 잃고 있는 형편이다.
신·구주류측의 대립이 당무회의라는 공간을 매개로 이뤄지면서 단연 관심사는 회의 주재자인 정 대표의 선택. 어차피 양측간 합의에 의한 신당추진기구 구성안의 만장일치 처리가 어려워진 만큼 의사봉을 쥔 정 대표로서는 어떤 식이든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다.
이 때문에 실제 당무회의에서 신당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지난달 30일 직전부터 정 대표는 신·구주류 양측으로부터 안건 상정 및 표결 처리 등과 관련해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무회의에서 정 대표의 행동에 따라 신당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자연 신·구주류 양측 모두 정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우선 구주류측은 정 대표가 “통합적인 개혁 신당을 만들겠다. 구주류 세력을 모두 감싸안고 가겠다”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신주류의 등쌀에 못 버티고 표결을 강행하거나 의사봉을 두드리는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구주류의 한 핵심 중진은 기자들에게 “정 대표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많이 보여 믿을 수 없다. 말로만 우리를 안심시켜 놓고 갑자기 신당 추진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표결을 강행하거나 의사봉을 두드릴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구주류측은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혹 당무회의에서 정 대표가 전격적으로 신당추진기구 구성안 표결 처리를 시도할 것에 대비, 회의 때마다 정 대표 좌우에 박상천 최고위원, 최명헌 고문 등 자파 인사를 배치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상황.
나아가 구주류측 일부 과격 당원들은 당사 정 대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신당 추진 의결 과정을 정 대표가 공평하게 진행하지 않을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 대표실을 불 질러 버리겠다”며 윽박지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신주류측은 ‘신당추진기구안 표결 처리를 책임지고 추진하라’고 정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신기남 의원은 “어차피 이제 합의에 의한 신당추진기구 구성은 틀렸고 당무회의 표결을 거칠 수밖에 없다”며 “이제는 정 대표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대표와 함께 신주류의 ‘투톱’인 김원기 고문도 “정 대표가 충돌을 막기 위해 이제껏 합의를 추진해 왔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며 가세했다.
강경파 일각에서는 ‘정 대표가 계속 표결 처리를 미룰 경우 현 지도부 일괄사퇴를 추진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대두되고 있는 상황. 한 의원은 “구주류측이 계속 당무회의를 통한 신당 방해공작을 계속할 경우 구주류 중심의 현 최고위원 체제를 해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최악의 경우 정 대표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신·구주류 양측이 이처럼 압박을 강화하자 “분당은 재앙인 만큼 온몸을 던져 막겠다” “신당은 분당으로 가서는 안되며 정대철 사전에 그런 것은 없다”고 공언해온 정 대표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
구주류측이 ‘신당추진기구 구성=분당’으로 규정하며 표결 처리를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저지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데다 이창복 심재권 김영환 의원 등 재야출신 중도파 의원들도 ‘신당 논의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는 터라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정 대표가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정 대표의 한 측근은 “정 대표는 가급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신당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특히 정 대표와 비슷한 입장인 다수는 침묵하고 있는 반면 목소리가 큰 신·구주류 강경파들이 정 대표를 몰아세우기만 하고 있어 사면초가의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정 대표는 최근 한 사석에서 꼬여가기만 하는 신당 갈등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으면서 노 대통령과 신주류 강경파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는 “신당에 대한 신주류측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나눠지면서 상황이 갈수록 어렵게 가고 있다. 특히 ‘노심’(盧心)을 앞세운 일부 강경파들이 판을 엉뚱하게 벌여 놓고서는 모든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한심스러운 일이다. 노 대통령이 처음부터 강경파들에게 ‘신당문제는 정 대표와 김원기 고문과 의논하라’고 선을 그어줬다면 사태가 이처럼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대표는 최근 자신의 복잡한 처지와 심경을 얘기하면서 선친인 정일형 박사 얘기를 자주하곤 한다. ‘분당 없는 신당’이란 좌표를 강조하면서다. 그러나 민주당 내 사정은 정 대표의 약속과는 자꾸만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상황.
지난 77년 33세의 나이로 8선 의원이었던 선친의 지역구에서 출마해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5선 관록을 쌓아온 ‘백전노장’ 정 대표가 신·구주류 양측의 압박속에 ‘샌드위치’가 된 최근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영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