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대통령실 이명박 사람들 반면 본인은 노무현 ‘탈권위’ 벤치마킹…임기 말까지 지속 여부 관건
그런데 윤 대통령이 기용한 내각 및 대통령실 참모들의 상당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이다. 이 때문에 정가에선 윤석열 정부를 두고 ‘하이브리드 정부’라는 반응을 내놓기도 한다. 임기 말까지 이런 주행성능을 보이면 맛있는 비빔밥이 되겠지만, 초심을 잃어버릴 경우 아무렇게나 뒤섞여 제 맛을 잃어버린 잡탕밥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데자뷔
문재인 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오랫동안 청와대 근무를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이 이끌던 ‘문재인 청와대’에서도 딱딱한 회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A4 용지에 적힌 모두발언을 읽으면 출입기자들이 이를 받아쓰고, 이 발언이 끝나면 기자는 퇴장해 비공개회의로 전환되는 식이었다. 대통령 모두발언이 일종의 국정지휘 지침이 됐고, 행정부는 물론 여당마저도 이에 따라다닌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이 관행을 깨겠다고 나섰다. 그는 취임 다음날인 5월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5층 회의실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첫 주재하면서 회의를 회의답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참모가 건넨 모두발언도 읽지 않고, 보여주기식 카메라 촬영도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윤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앞에 놓인 모두발언 원고를 가리키며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하는데 비효율적이고 어색하다”며 “여기 써준 것에는 ‘첫 번째 수석비서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돼 있는데) 무슨 법정 개정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준비된 모두발언 원고의 상당 부분을 읽지 않으며 바로 격식을 깨버렸다.
이어 “각자 복장도 자유롭게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고”라며 “카메라 찍을 일 없으니까 너무 점잖게는 하지 말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 회의를 전면 비공개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언론을 의식하지 않고 국정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해보자는 취지로 해석됐다.
회의는 출입기자 없이 비공개로 하지만, 출입기자들에 대한 브리핑은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5월 11일 용산 청사로 첫 출근하면서 출입기자와 질의응답을 했다. 대통령과 출입기자가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과거 청와대 풍경과는 달라진 장면이었다.
윤 대통령은 첫 출근 소감을 묻는 출입기자 질문에 웃으면서 “어제 첫 출근하기는 했다”며 “제가 어제 취임사에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통합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여야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답을 내놨다. 윤 대통령은 ‘오는 12일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장관을 임명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글쎄 그건 제가 출근해서 챙겨봐야 한다. 많이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윤 대통령은 공식석상은 물론 사석에서도 노 전 대통령에 여러 차례 호평을 해왔으며, 그의 장점을 적극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반부터 탈권위 행보로 화제를 뿌리면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는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2003년 3월 18일 청와대 국무회의서 파격을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이 예정시각보다 13분이나 일찍 회의장에 들어선 것이다. 국무회의장에는 절반가량의 장관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미리 와있던 장관들도 대통령의 이른 등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어디 차 마실 데 없나. 우리 정부는 장관들에게 차도 안 주나”라며 장관들과 악수를 나눴다.
노 전 대통령은 한명숙 당시 환경부 장관이 “이렇게 불쑥 들어오시면 어떡하느냐”고 하자 “옷 다 입고 있는데 뭘”이라고 답하면서 긴장하고 있던 장관들에 큰 웃음을 만들어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참여정부 장관은 이해집단의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다. 어느 방향을 스스로 판단해서 정하면 열정과 소신을 갖고 국무회의에서도 싸우고, 이해집단들과도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에 내놓은 발언과 비슷하게 들린다.
문희상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무현 청와대 초기 풍경을 설명하며 “수석이나 보좌관 누구도 대통령 앞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운다. 처음에 나는 ‘이 정도가 돼도 될까’라는 생각도 했다”고 언론에 전한 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초반, 매주 금요일 저녁 대통령 관저에서 대통령과 수석·보좌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자유토론도 열렸다. 이 회의에서 대통령과 참모들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활발히 의견을 개진했다.
누구와도 토론하고 얘기를 들어보겠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금실 초대 법무부 장관 및 검찰 인사에 집단 항명하는 전국 평검사들과도 직접 만나 토론회를 가졌다. 취임 이후 불과 13일이 지난 시기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검찰개혁 방향을 의논하기 위해서 평검사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문재인 민정수석까지도 ‘대통령이 직접 검사들을 만나는 것이 무리하게 보인다’고 다들 말렸다”고 털어놓으며 본인이 직접 이 행사를 강행했음을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윤 대통령은 검사 생활을 할 때부터 수사관들과 격의 없이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는 등 소탈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최근 행보가 특정 대통령을 닮으려고 하는 인위적 모방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노 전 대통령의 좋은 점과 업적을 잘 알고 있어서 장점은 충분히 받아들이려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석열 사람들은 정통 보수
윤석열 정부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킬 만큼 종전 보수정부의 대통령과는 완전히 다른 탈권위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정부와 대통령실 구성원들은 보수 인사들로 채워진 셈이다. 윤석열 정부 1기 내각의 15개 부처·국무조정실 차관 및 차관급 인사 20명 중 이명박 정부 청와대 출신(방기선·조현동·장영진·조규홍·이기일·이도훈)이 6명이고, 박근혜 정부 청와대 출신(방기선·이도훈·김기웅·전병극·이원재·송상근·조주현)은 7명이다.
대통령실 비서관으로 발탁된 20명 가운데에도 이명박·박근혜 청와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인사가 7명에 이른다. 백태현 통일비서관, 임기훈 국방비서관, 이문희 외교비서관, 임상범 안보전략비서관, 최철규 국민통합비서관, 이병화 기후환경비서관, 박민수 보건복지비서관이다.
대통령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대통령실 실장·수석·비서관급 10명을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 계열이 압도적이다. 10명 중 4명(김성한 안보실장, 김태효 안보실 1차장, 강승규 시민사회수석, 최상목 경제수석)이 17대 대통령직인수위·청와대에서 자문하거나 직책을 맡아 역할을 한 이력이 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을 했던 김대기 현 대통령실 비서실장까지 포함하면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의 절반이 이명박 정부 출신이다.
윤 대통령의 최측근, 이른바 ‘윤핵관’으로 불리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장제원 전 당선인 비서실장 등이 과거 친이계라는 점에서 이명박계의 약진이 이뤄진 것으로 관측된다. ‘0선’ 출신으로 정치경력이 짧은 윤 대통령으로서는 임기 초반 측근들의 인사 추천에 많이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분석이다.
국민의힘 한 현역 의원은 “대통령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참모들 면면을 보면 정부의 모습이 나온다”며 “윤석열 정부 인사를 보면 능력 있고 경험 많은 인재를 기용해 반드시 성과를 내려고 하는, 즉 유능한 정부라고 하는 보수의 정체성을 충분히 지킨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여소야대' 노태우 정부 학습 주문도
윤 대통령 행보를 바라보는 정치권 관계자들은 멀리 볼 것도 없이 5년 전을 떠올려보라고 주문한다. 출발이 좋다고 끝까지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취임 초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적극적 소통 행보를 보였다. 청와대 수석들과 오찬 후 산책을 하면서 대화하는 모습이 언론에 연일 공개됐고 길 가던 시민들과의 대화, 5·18 유족과 포옹하는 모습 등으로 소탈하고 격의 없는 행보가 주목됐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외향적 성격이 아닌 문 전 대통령은 소통에 한계를 드러냈다. 취임 직후에는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을 방문해 인사 내용을 직접 설명할 만큼 언론 친화적 태도를 보이다가, 점차 불통 논란에 휩싸였다.
더불어민주당 한 전직 의원은 “임기 초반에는 대통령 지지도가 괜찮게 나오고 국민적 기대가 높기 때문에 지금의 윤 대통령처럼 적극적인 소통행보가 가능하지만, 곧 여러 가지 국정 악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기자들 앞에서 입을 떼려고 해도 천근만근으로 느껴질 것”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경험이 많은 보수정부 출신 참모들은 중용하겠지만 정말 성공하려면 한미FTA를 추진하는 등 진영을 과감히 넘나든 노 전 대통령의 돌파력도 제대로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으로 노무현 정부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노태우 정부에 대한 학습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5월 1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노태우 정부 때도 여소야대였다. 3당 합당으로 역사에 아름답지 못한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그 2년간 여소야대 정국에서 중요한 정책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처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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