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범·박해민 시즌 첫 홈런 쏘아올려…손아섭·박병호는 제 실력 발휘 못해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이 줄줄이 FA 자격을 얻은 영향이 크다. 확실한 주전급 전력 보강이 절실했던 구단들은 모기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다른 팀 프랜차이즈 스타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었다. 프로 생활 내내 뛰었던 팀을 떠나는 것은 선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프로는 결국 '돈'이 가치를 결정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다. 주가가 하늘을 찌를 때 거액을 들고 와 '모셔 가겠다는' 구단을 선수가 마다할 이유는 없다.
결국 나성범(NC 다이노스→KIA 타이거즈), 손아섭(롯데 자이언츠→NC), 박건우(두산 베어스→NC), 박병호(키움 히어로즈→KT 위즈), 박해민(삼성 라이온즈→LG 트윈스) 등을 포함한 7명이 팀을 옮겨 역대 FA 시장 최다 이적 타이 기록을 세웠다. 이들 모두 전 소속팀에서 유독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던 스타들이다. 그런 그들이 하루아침에 다른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 '적'이 됐으니, 옛 동료들과 팬들은 적잖은 충격과 애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FA 이적생들과 친정팀의 첫 대결은 올 시즌을 더 흥미진진하게 하는 관전 포인트가 됐다.
#막혔던 '홈런의 혈' 뚫어
KIA 외야수 나성범은 지난 FA 시장의 '최대어'로 꼽혔다. 광주 진흥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뒤 2012년 NC에 입단한 그는 2014년과 2015년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국가대표급 외야수로 성장했다. 2020년에는 타율 0.324과 홈런 34개, 112타점을 기록하면서 NC의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지난해 역시 33개의 아치를 그리면서 여전한 파워를 과시했다. 거포 외야수 보강이 필요한 구단에게는 최고의 카드였다.
NC도 나성범과의 잔류 계약에 힘을 쏟았다. 그의 등번호가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이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KIA가 나성범 영입에 뛰어들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안정적인 외야진 구축이 절실했던 KIA는 광주 출신인 나성범에게 '올인'했다. 6년 총액 150억 원. 나성범은 거절하기 어려운 거액이 적힌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광주로 향했다.
NC만 나성범에게 애착이 컸던 게 아니다. 나성범 역시 NC와 창원에 정이 많이 들었던 터다. 그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적 후 나오는 기사들을 보니, NC 투수들이 전부 '성범이 형을 만나면 삼진 잡겠다'고 하더라. 다들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농담하면서 "사실 그 친구들도 내 약점을 알 거고 나도 잘 알고 있다. 실투가 들어왔을 때 내가 어떻게 해결하느냐, 유인구가 왔을 때 얼마나 잘 참느냐, 이런 게 관건이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나성범은 5월까지 NC와 총 6경기에서 만났다. 결과는 24타수 6안타(타율 0.250)에 홈런 2개. 특별할 것 없는 성적이다. 다만 첫 홈런이 나성범에게는 무척 값졌다. 그는 KIA 이적 후 꾸준히 안타를 때려냈지만 10경기 넘도록 홈런을 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꽉 막힌 듯했던 '홈런의 혈'은 정작 NC를 만나자 시원하게 뚫렸다. 4월 15~17일 NC와의 첫 3연전. 나성범은 익숙했던 창원NC파크에서 처음으로 원정 팀 더그아웃에 앉아 경기를 치렀다.
3연전 첫 두 경기에서 모두 안타를 친 나성범은 마지막날인 17일 3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옛 동료 송명기의 슬라이더를 받아쳤다. 타구는 그대로 오른쪽 담장을 넘어갔고, 나성범은 친정팀 덕에 시즌 첫 번째이자 KIA 이적 후 첫 홈런을 신고했다. 큰 것 한 방으로 친정팀을 울린 나성범은 3-3으로 맞선 8회 초 밀어내기 볼넷으로 결승 타점까지 얻어내 이날의 주인공이 됐다. 앞선 두 경기에서 1승 1패를 기록했던 KIA는 나성범의 활약으로 위닝 시리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LG 외야수 박해민도 나성범처럼 친정팀 삼성을 상대로 이적 후 첫 홈런 손맛을 봤다. 2012년 삼성에 육성 선수로 입단한 그는 2015년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뒤 4년 연속 도루왕(2015~2018년)에 오른 '신화'의 주인공이다. 빠른 발과 넓은 수비 범위를 인정 받아 2018 광저우 아시안게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팀 주장을 맡아 후배들을 이끌기도 했다.
올해 우승을 목표로 삼은 LG는 KBO리그 야구장 중 가장 큰 잠실구장에서 박해민의 발과 수비가 더 빛을 볼 거라고 판단했다. 잠실구장을 홈으로 공유하는 오랜 라이벌 두산 베어스가 포스트시즌마다 중견수 정수빈의 수비와 베이스러닝 덕을 톡톡히 보는 점도 참고했다. 결국 4년 총액 60억 원을 들여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박해민을 데려왔다.
새 소속팀 LG에서 박해민은 기대 이하의 출발을 했다. 수비와 발은 녹슬지 않았지만, 타율이 1할대에 머물면서 타격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친정 삼성을 만나자 배트가 날카롭게 돌았다. 첫 맞대결이었던 4월 26~28일 대구 경기에서 2루타를 포함해 3일 연속 안타 행진을 펼쳤다.
한 달 뒤인 5월 27~29일에는 새 홈 구장 잠실에서 다시 삼성과 재회했다. 5월 초까지 타격 슬럼프가 이어져 고생하던 그는 삼성을 만나자 다시 타격이 살아났다. 3연전 기간 성적이 14타수 6안타. 특히 28일에는 3안타로 펄펄 날았다. 2회 말 옛 동료 백정현의 직구를 공략해 잠실구장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3점 홈런까지 때려냈다.
박해민은 '거포형 타자'와 거리가 멀다. 데뷔 이후 두 자릿수 홈런을 친 시즌도 2020년(11개)이 전부다. 지난 시즌에는 타자 친화적인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를 홈으로 쓰면서도 홈런 5개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런 그가 하필 친정팀을 상대로 1년에 몇 차례 나오지 않는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날 안타, 3루타, 홈런을 때려낸 그는 사이클링 히트에 2루타가 하나 부족한 맹활약으로 팀 승리의 중심에 섰다.
#효자 FA들, 친정 향한 온도 차
나성범을 놓친 NC는 부랴부랴 다른 팀에서 나온 FA 외야수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대어급 외야수 두 명을 잡는 데 성공했다. 두산 출신 박건우와 6년 총액 100억 원, 롯데 출신 손아섭과 4년 총액 64억 원에 각각 계약했다. 박건우와 손아섭은 둘 다 3할 타율, 두 자릿수 홈런과 도루, 준수한 수비가 두루 가능한 수준급 외야수다. 콘택트 능력도 뛰어나다. 이정후(키움)에 이어 KBO리그 현역 선수 통산 타율 2~3위에 올라있다. 나성범 이적으로 생긴 NC의 외야 공백을 메우기에 부족함 없는 대안이었다.
박건우는 6월 1일 허벅지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기는 했지만, 이전 49경기에서 타율 0.331, 홈런 3개, 30타점을 올려 NC 타선의 중심을 잡았다. 5월 31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이적 후 처음으로 한 경기 4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손아섭 또한 첫 52경기에서 타율 0.320을 기록하면서 공수에서 힘을 보탰다.
다만 이들이 친정팀을 대하는 온도는 극명하게 달랐다. 박건우는 두산을 상대로 평소처럼 활약했다. 5월까지 두산전 6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8로 좋은 성적을 냈다. 반면 손아섭은 롯데를 상대로 힘을 온전히 쓰지 못했다. 총 여섯 차례 만났지만, 타율 0.261로 주춤했다. 그나마 롯데전 마지막 두 경기에서 각각 3안타와 2안타로 연속 멀티 히트에 성공한 게 위안거리다. 손아섭이 다음 롯데전에서 자존심을 회복할지 주목되는 이유다.
올 시즌 홈런 1위를 달리고 있는 박병호에게도 친정팀은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는 지난해까지 키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2005년 LG 1차지명을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2011년 트레이드를 통해 넥센(현 키움)으로 이적한 뒤 '유망주' 꼬리표를 떼고 잠재력을 폭발했다. 특히 홈런 부문에선 적수가 없었다. 이적 첫 시즌부터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고, 2012년 홈런 31개를 날리면서 데뷔 후 첫 홈런왕에 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해부터 2015년까지 4년 연속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이승엽(2003년·56개) 이후 처음으로 50홈런을 돌파하면서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박병호는 2016년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다가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복귀 첫 시즌인 2018년에도 홈런 43개를 쳐 건재를 알렸다. 다만 그가 하필 예비 FA 시즌에 최악의 성적을 낸 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키움은 지난해 타율 0.227을 기록한 박병호와의 FA 협상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때 KT가 움직였다. "박병호가 여전히 중심타자로서 힘을 갖고 있다"고 판단해 3년 총액 30억 원에 재빨리 낚아챘다. 이강철 KT 감독도 박병호에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하던대로, 편하게 하면 된다"며 따뜻한 환영 인사를 건넸다. 키움 구단을 향한 친정팀 팬들의 분노 속에 KT로 이적한 박병호는 올 시즌 연일 전성기를 능가하는 홈런쇼를 펼치며 부활을 알리고 있다. 특히 5월 한 달간 홈런 11개를 치고 28타점을 올리면서 리그 최고의 장타력을 뽐냈다. 개막 직후 주포 강백호가 부상으로 장기 이탈한 KT 입장에선 박병호의 존재가 더 든든했다.
하지만 대표적인 '효자 FA' 박병호는 친정팀 키움에도 '효자'였던 듯하다. 그가 이적 후 처음으로 고척스카이돔에 '원정 경기'를 하러 온 날, 키움 구단은 전광판을 통해 박병호 환영 메시지와 기념 영상을 띄웠다. 박병호의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나타난 키움 팬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그를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다. 박병호 역시 고척 첫 경기 전 훈련을 앞두고 옛 동료들에게 달려가 포옹하고 담소를 나누는 등 추억에 잠겼다. 첫 타석에서 볼넷을 골라 1루에 나간 뒤에는 헬멧을 벗고 키움 팬들의 응원에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박병호의 키움전 6경기 성적은 타율 0.250, 홈런 1개, 1타점이다.
#포수는 신중하게 보내야
야구에서 포수는 '팀 전력의 절반'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로 중요한 포지션이다. 마운드에 선 투수의 공을 직접 받아내고, 공 하나마다 사인을 주고받으며 경기를 풀어나가야 하기에 더 그렇다. 팀 투수들이 던지는 구종, 투구 패턴, 공의 궤적과 구위, 구질 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도 포수다. 포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 그동안 팀에서 사용했던 사인을 모두 바꿔야 하니, "포수 트레이드는 웬만하면 삼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이적생 포수들 중엔 친정팀을 상대로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맹타를 휘두르는 사례가 꽤 많았다. 올해 LG와 2년 총액 4억 원에 FA 계약한 허도환이 대표적이다. 그는 2018년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에서 에이스 김광현과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순간을 함께했고, 지난 시즌에는 KT에서 창단 첫 통합 우승을 경험한 '우승 포수'다. LG로 이적한 올 시즌에는 주전 포수 유강남의 백업으로 출장하고 있는데, 유독 친정팀 KT전에서 인상적인 타격을 했다. 5월까지 22경기 타율이 0.286이지만, KT전 4경기에선 5타수 4안타로 안타 적중률이 높다.
허도환 이전에 NC 포수 양의지도 그랬다. 2006년 두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9년 NC와 4년 총액 125억 원에 FA 계약을 해 처음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이적 첫 시즌인 2019년 그의 두산전 성적은 타율 0.339, 홈런 9개. 양의지는 모든 팀이 까다로워하는 강타자지만, 두산 투수들에게는 더욱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산의 한 투수는 "의지 형은 내가 어디로 뭘 던질지 다 알고 있는 거 같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13년간 롯데 주전 포수로 활약했던 강민호도 FA 자격을 얻어 삼성으로 이적한 2018년 롯데전에서 홈런 6개를 날려 공사(公私) 구분을 확실하게 했다.
문제는 올 시즌이 끝나면 대형 포수 FA가 시장에 줄줄이 쏟아진다는 거다. 각 팀 주전 포수 중 4명이 올해 '예비 FA' 시즌을 보내고 있고, 포수 보강이 필요한 구단들은 벌써 이들을 염두에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일단 '잘 뽑은 포수 FA'의 효과를 확실하게 보여준 양의지가 두 번째 FA 자격을 얻는다. 계약기간 4년 동안 대체 불가능한 현역 최고 포수의 존재감을 여러 차례 보여줬으니, 벌써부터 "첫 번째 계약과 비슷하거나 큰 차이 없는 조건에 계약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야구 관계자가 많다. LG 유강남, KIA 박동원, 두산 박세혁은 2023년 처음으로 FA 자격을 얻는 포수들이다. 박동원은 이미 지난달 트레이드를 통해 키움에서 KIA로 옮겼는데, 그 후 친정팀 키움과 맞붙은 3경기에서 11타수 4안타(타율 0.364), 홈런 3개를 기록해 역시 강한 면모를 뽐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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