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 재보선을 거치며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해 정치생명 최대 위기를 맞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 그가 이번엔 야권 통합에 앞장서자 일부에선 “60년 전통의 민주당을 친노그룹에 갖다 바친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단지 외풍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탑이 안에서부터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년 동안 쌓아 온 탑이 일거에 무너질 위기의 근원은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하고, 더러는 “무너진 것과 진배 없다”는 말도 나온다. 수년간 배 곯고 참아가며 탑을 쌓아 온 석공으로선 이보다 더 허망한 낭패는 없을 것이다.
웬 뜬금 없는 ‘공든 탑’ 타령이냐고 타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는 10·26 재·보궐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생명 최대의 위기를 맞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직 제1야당 대표를 맡고 있어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손 대표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다는 데에는 민주당 내에서 별 이견이 없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지난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의 전신)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서 패한 뒤 지난 4년간 이어 온 손학규 대표의 정치행보는 그야말로 ‘탑 쌓기’를 연상케 한다. 대통합민주신당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연거푸 참패하자 손 대표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춘천의 대룡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원격 정치’도 하지 않았다. 농사 짓고 닭을 키우며 2년여에 걸쳐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작 대선후보로 나섰던 정동영 현 민주당 최고위원보다 더 책임을 통감하는 모양새를 보임으로써 전통적 지지층과 호남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뿐만 아니었다. 중간 중간 주요 선거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외도’를 감행, 적극적인 선거 지원에 나섰다. 2009년 두 차례의 재·보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을 때 그 배경엔 어김없이 그가 서 있었다.
지난해 8월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 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한 뒤에도 그의 ‘탑 쌓기’는 이어졌다. 당직 인선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들을 챙기기보다는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추천한 인사를 대거 발탁하는 등 적극적인 ‘호남 끌어안기’에 나섰다. 지난 4·27 재·보선 때에는 당내 비주류의 ‘손학규 흔들기’ 공세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경기 성남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말 그대로 ‘참회’와 ‘헌신’의 정치행보를 보여줬다. 이로써 그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떼고 범야권을 대표하는 차기 대선주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됐다. ‘탑 쌓기’가 효험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10·26 재·보선에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완만하지만 상승세를 탄 것처럼 보였던 손 대표의 정치적 영향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 온 시련에 당황한 탓일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단 악수까지 겹치면서 시련은 정치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기로 증폭돼 갔다.
위기는 외풍에서 비롯됐다. “서울시장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안철수 원장의 말 한마디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박원순 서울시장을 밀어주는 쪽으로 결론 났지만 안 원장은 일약 ‘박근혜 대세론’을 깨고 범야권의 대표적인 차기 대선주자로 부각됐다. 대안부재론 속에 손 대표에게 쏠려 있던 야당 지지층의 마음은 급속하게 안 원장에게로 옮겨갔다. 문재인 이사장의 등장으로 움찔했던 손 대표로선 난데없는 ‘안철수 태풍’에 집도 절도 잃게 된 셈이다.
▲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후보와 회동 모습.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손 대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확장성 면에선 안 원장에 밀리고 개혁성 면에선 문 이사장에게 밀리는 형국이다. 더욱이 안 원장과 문 이사장 모두 대선 승리를 위해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PK(부산·경남) 출신 인사다. 이는 전통적인 야당 지지층과 호남이 더 이상 손 대표를 전략적으로 선택할 이유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위기의 원인이 외풍에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손 대표의 처지는 그렇지 못하다. 10·26 재·보선과 그 후에 보여준 손 대표의 일련의 정치행보는 그의 측근으로 분류됐던 의원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이는 내년 범야권 대선후보 경선 때 손 대표의 지지기반이 돼야 할 민주당 내에서 급속한 ‘손학규 이탈’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손 대표의 첫 번째 패착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선출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굼뜬 행보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손 대표는 이미 출마선언을 한 천정배 최고위원에게 두 차례나 불출마를 종용했다가 거센 반발을 샀다. 출마선언이 너무 빨라 ‘천사인 볼트’라는 오명을 얻긴 했지만 이미 의원직 사퇴 카드까지 꺼내며 선을 넘어가버린 천 최고위원에게 출마하라, 마라 얘기한 것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제1 야당 대표와 최고위원이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험악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송됐고 민주당은 우스운 모양새가 됐다.
끝이 아니었다. 손 대표는 천 최고위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다른 당내 후보들과도 등을 지게 됐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던 한 후보 측 관계자는 “손 대표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범야권 단일후보로 점찍어놓고 민주당 후보들을 들러리로 세우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박원순 서울시장을 입당시켜 경선을 치르자는 게 손 대표의 구상이었던 것 같은데, 박 시장의 입당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고 말했다. 당 일각에선 당시 손 대표가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출마를 종용, 한 전 총리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여곡절 끝에 박영선 의원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됐지만 이미 민주당은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였다. 10월 3일 범야권 서울시장 후보 경선 당일 민주당은 마치 한나라당처럼 젊은 층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기만을 바랐지만, 결과는 완패였다.
손 대표의 두 번째 패착은 10월 4일부터 만 하루 동안 벌어진 사퇴와 번복 파동이다. 손 대표 자신은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지겠다”며 대표직 사퇴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선거를 앞두고 무슨 무책임한 행태냐”는 당내 비판과 “범야권 경선 결과에 대한 불복 아니냐”는 박원순 시장 측의 반발이었다.
결국 손 대표는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대표직에 복귀했지만 당내 의원들과 당원들에게 ‘예측 불가능한 정치인’이라는 좋지 못한 인상을 남겼다. 민주당 내에서 ‘손학규 사람’으로 통하는 한 의원은 “사퇴 선언을 할 때나 번복할 때나 손 대표로부터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며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갑작스럽게 선거운동을 중단했던 때가 떠오르면서 ‘이렇게 독선적인 사람하고는 더 이상 같이 못 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손 대표의 세 번째 패착은 10·26 재·보선 이후의 어정쩡한 행보다. 민주당의 재·보선 성적표는 누가 봐도 낙제 수준이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이는 ‘절반의 승리’일 뿐이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전북 지역을 제외하곤 전패했다. 선거를 앞두고 사퇴 파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으로서 마땅히 책임 지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최소한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사과하고 향후 당 쇄신 및 야권통합 구상을 밝힐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재·보선 다음 날인 10월 27일 40대 원외 총선 출마 예정자들을 필두로 지도부 책임론이 제기됐지만 1주일이 지난 11월 3일에 이르러서야 손 대표의 화답이 나왔다. 그나마도 새 지도부 선출 등 당 쇄신 방안은 전무한 야권통합 제안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손 대표가 야권통합이 안 되면 내년 대선 불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내용의 언론 보도까지 나와 손 대표에 대한 반감에 기름을 부었다. 사실 ‘조건부 대선 불출마’ 카드는 손 대표의 측근 일부가 제안했다가 거부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생명을 거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통합에 소극적인 세력들을 압박하고 야권통합 과정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구상이다. 사실상 폐기된 카드이지만 그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당내에선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호남에 지역구를 둔 한 민주당 의원은 “쇄신의 대상인 손 대표가 대선 1년 전 사퇴하도록 돼 있는 당헌 규정을 무시하고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의원은 “게다가 마치 손 대표 자신은 야권통합을 바라고 나머지 민주당 사람들은 통합을 거부하는 것처럼 비쳐지게 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3일 야권통합 제안에 앞서 손 대표가 ‘혁신과 통합’을 주도하고 있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문성근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를 만났다는 사실까지 전해지면서 당내 비주류 및 호남지역 의원들의 반감은 더 커지는 양상이다. 한 호남지역 의원은 “60년 전통의 민주당을 친노그룹에 갖다 바치고 자신의 영향력은 유지하겠다는 것”이라며 “민주당에는 애정이 없는 한나라당 출신임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놨다. “아무리 원해도 손 대표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 의원의 말 속에 향후 손 대표가 걸어가야 할 험난한 길이 응축돼 있는 듯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