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8월30일 최고위원 경선을 위해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함께 앉아있는 권노갑 전 고문(왼쪽)과 한 화갑 의원. 동교동계 내부의 권력투쟁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 ||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가신그룹인 동교동계는 당시 통제권을 벗어나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여권 내에서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DJ는 결국 갈등의 양 축인 권, 한 위원의 동반퇴진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메시지는 문화부 장관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박지원씨가 전달했다. DJ의 분노를 체감한 ‘양갑’은 일단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양갑 동반퇴진론’은 DJ의 진심이 아니라 ‘엄포용’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권, 한 위원이 갈등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실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봐야 한다. 사태의 발단이 됐던 12월2일 청와대 최고위원 만찬 상황 자체가 DJ로서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이날 “당의 의사결정 구조가 동교동 핵심 실세에 의해 좌우되고 있고 실세들의 당정 인사 개입 논란, 거듭되는 금융비리 연루 의혹 등이 여권의 부담이 되고 있다”며 권 위원의 2선 후퇴를 공식 요구했다. 김근태, 정대철 등 다른 최고위원들도 국정시스템 쇄신을 주장했다.
칼날을 권 위원에게 겨눈 것은 바로 DJ의 통치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더욱이 만찬이 계속되는 2시간여 동안 DJ는 몸을 곧추세우고 경청했던 반면 최고위원들은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 인사는 화장실에 다녀왔고 또 다른 인사는 웃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정 위원의 폭탄발언이 진행되는 동안 저지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정권 초기에는 상상할 수 없던 태도들이었다.
DJ는 충격을 받았지만 국정운영의 개선 의지를 밝히면서 소장파들을 달랬다. 그러나 정 위원 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흘 뒤인 6일 10여 명의 소장파들과 함께 권 위원의 퇴진을 재차 요구했다. 벼랑에 몰린 권 위원은 정 위원의 배후에 한화갑 최고위원이 있다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일본을 방문중이던 한 위원은 “나도 정치인으로서 할 말은 하겠다. 음모론이야말로 또 다른 음모다”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DJ가 동반퇴진론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면 권, 한 위원은 사생결단식 권력투쟁을 중단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이처럼 DJ가 수족을 잘라낼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던 양갑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권노갑과 한화갑 간의 태생적 차이가 그 출발점이었다. 같은 동교동계였지만 성격과 스타일, 맡았던 임무 등이 전혀 달랐다. 동교동계의 ‘성골’급은 ‘야근조’였다.
야당시절 DJ의 동교동 자택의 ‘쪽방’에서 밤을 지샜던 야근비서들이다. 동교동계 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윤철상 등 ‘권노갑계’는 야근조 출신이 주류다. 또 이들이 자금, 조직, 집안살림 등을 맡았다.
반면 문희상, 설훈, 배기선, 배기운 의원 등 ‘한화갑계’는 학벌이 좋은 편이고 야근조가 드물었다. 한화갑 의원은 야당시절 해외공보비서 역할을 주로 했다. 문희상 의원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 우대를 받아서 야근기간이 짧았다는 얘기도 있다.
한 의원측 관계자는 “야당시절부터 권노갑씨는 자금과 조직을 담당했다. 덕분에 독재정권 치하에서도 상대적으로 금전적인 면에서 어려움이 덜했다. 반면 한화갑씨는 해외공보비서로서 ‘돈 구경’을 못했다. ‘권노갑씨가 자장면을 먹을 때 한화갑씨는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다녔다’는 식의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전했다.
DJ도 권노갑계에 대한 애정이 더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이희호 여사는 한 의원을 아꼈다. 한 의원이 외로움을 느낄 때 이 여사가 적지 않게 지원사격을 해줬다는 얘기다. 한 의원이 야당시절 DJ를 수행해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을 때도 이 여사 주변에 앉았다고 한다.
그때 이 여사와 동행한 한 여교수가 한 의원에게 “동교동계는 고졸 출신이고 충성심으로 버티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한 의원처럼 명문대(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비서도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충격을 받은 한 의원은 DJ에게 여교수의 말을 전하면서 명문대 출신을 충원해 이미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목포상고 출신으로 D대학을 나온 권노갑측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양측은 이 같은 이질감과 내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정권 초기까지는 타협적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2000년 4·13총선을 전후로 갈등의 불씨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한화갑의 변신’과 ‘권노갑의 전횡’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게 그 단초가 됐다.
한 의원의 경우 총선 직전부터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으면서 권노갑측에 대한 불만을 수시로 토로했다. 한 의원은 집권 초부터 줄곧 “나의 정치적 목표는 ‘DJ 대통령 만들기’였다. 이제 정권을 잡은 이상 개인적인 정치적 목표는 없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총선이 임박해진 시점에 한 의원은 “나 정도 돼서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그냥 표를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제대로 정치를 해볼 테니 밀어달라고 호소하겠다”고 강조했다.
DJ의 가신이 아닌 정치인으로서 독립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 시기에 한 의원이 정권 초에 역설했던 ‘호남대통령 불가론’을 접고 ‘호남대통령 가능론’을 흘린 것도 주목됐던 변화였다.
▲ 2000년 8월30일 임시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지 명돼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인사하는 권 전 고문. | ||
거꾸로 권 전 고문이 총선 공천권을 장악했던 점은 한 의원의 불만을 깊게 만들었다.
당시 민주당은 ‘새 피 수혈’이라는 유행어를 낳았을 정도로 대대적인 물갈이를 기치로 내걸었다. 초기에는 인재 발탁은 정균환 원내총무가, 공천조율은 총재특보단장이었던 한화갑 의원이 담당하는 역할분담 체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최종 공천권은 권 전 고문이 장악하게 된다.
‘새 피’로 수혈된 인사들이 한 의원과 면담해서 출마 지역구를 의논해봐야 말짱 헛일이 됐다. 경기도 지역 출마를 노리고 입당했던 변호사 C씨는 “정균환 총무가 접촉을 해와서 민주당 입당을 결심했다. 그 후 공천을 받기 위해 한 의원을 두 차례 만났지만 왠지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알고 보니 내가 희망했던 지역구는 이미 권 전 고문이 다른 인사로 내정해 놓았었다”고 털어놨다.
권 전 고문이 자신과의 친소관계 등에 따라 수시로 공천 여부 등을 결정했던 것도 한 의원측이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대목이다. 당시 전국구 상위순번을 받아 무난히 원내 진출에 성공한 여성인 K의원은 권 전 고문이 처음에는 하위 순번에 배정했던 케이스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K의원이 권 전 고문의 방에 뛰어 들어가 ‘난리법석’을 펴서 순번을 뒤바꾸었다는 후문이다. K의원은 권 전 고문을 ‘오빠’라고 부르던 사이였다.
총선 이후 전당대회 개최시기 및 최고위원 출마를 둘러싼 논란은 권 전 고문과 한 의원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먼저 한 의원이 차기대권 도전의사를 내비치면서 호남지역 대표주자로서 최고위원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에 권 전 고문과 김옥두 사무총장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권경쟁이 조기에 가시화될 경우 레임덕 현상이 생긴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러나 한 의원이 ‘DJ 이후’를 노리고 지지기반을 다져왔다는 게 권 전 고문측의 판단이었다.
사실 한 의원은 집권 이후 영남지역 등 지방순회를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여왔다. 한 의원은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동서화합을 주장하면서 나에게 영남권 화해 역할을 부여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경상남·북도를 돌면서 호소했다. 덕분에 내가 호남 출신이지만 영남지역의 지지도가 만만치 않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한 의원이 영남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던 현불사 설송 스님을 꾸준히 관리해온 것도 대권플랜의 일환이었다는 관측도 나왔다. 설송 스님은 97년 대선 때 DJ의 승리를 예측했던 인물이다.
한 의원은 수시로 최고위원 경선 도전의지를 기자들에게 흘렸다. 5월에 청와대에서 DJ를 면담한 한 의원은 경선 출마 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한 의원측인 서영훈 대표는 6월 중순경에 처음으로 ‘8월 전당대회론’을 개진했다.
그 와중에 ‘김옥두 총장이 당사 집무실로 한 의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는 소문도 돌았다. 김 총장이 사무실 밖의 기자들이 들을 정도로 큰소리로 한 의원을 질책했고, 잠시 후 한 의원이 ‘벌게진’ 얼굴로 걸어나왔다는 얘기다.
한 의원은 직후 사석에서 “권력은 1%라도 더 가진 사람이 100%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에서 갖고 있는 권력은 1%도 안 된다. 99%의 권력은 권 전 고문이 쥐고 있다”고 소외감을 토로했다.
권 전 고문도 6월22일 DJ를 면담하고 난 뒤 최고위원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DJ의 재가를 받아낸 것이다. 하지만 권 전 고문은 7월 초순 출마의사를 번복했다. ‘권 전 고문과 한 의원이 동반 출마할 경우 최고위원 경선이 동교동계의 잔치가 될 것’이라는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DJ가 권 전 고문의 출마 포기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지명직 최고위원을 하라는 게 DJ의 주문이었다. DJ가 한 의원의 손을 들어줬던 셈이다.
▲ ‘권노갑 퇴진’을 주장한 정동영 의원. 권 전 고문측은 한화 갑 의원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 ||
권 전 고문측은 김 교수를 지원사격하면서 “목포 신안이 지역구인 한 의원이 지사가 되면 도청 이전문제로 전남이 양분된다”며 한 의원의 출마를 반대했다. DJ는 이 같은 권 전 고문측의 의견을 수용, 한 의원에게 불출마를 지시했다.
물론 양갑 관계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은 2000년 12월에 불거진 ‘권노갑 퇴진론’ 때문이었다. 권 전 고문은 당시 ‘퇴진 발언’을 한 정동영 위원의 배후에 한 의원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권 전 고문의 한 측근은 “정 위원이 청와대 만찬에 오기 전에 남궁진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선의원들의 뜻을 모아 전달하겠다는 얘기였다. 권노갑 퇴진론은 암시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초선의원들의 면면이 한화갑계였다”고 주장했다.
양갑 갈등은 DJ의 용인술이 부추긴 측면도 적지 않다. 상황에 따라 힘을 실어주는 쪽을 바꾸는 박정희 대통령식 ‘분할통치’를 즐김에 따라 둘 중 누구도 절대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당연히 경쟁심리가 깊어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DJ가 야당시절에는 권 전 고문을 절대 우위로 봤던 반면 집권 이후 한 의원의 정치적 성장을 배려했던 점은 결과적으로 갈등의 화근이 됐다. 야당시절에는 주요 당직을 전혀 맡지 못했던 한 의원은 집권 후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을 도맡게 된다. 권 전 고문으로서는 치고 올라오는 한 의원을 견제해야 했고, 역으로 한 의원은 권 전 고문에 대한 ‘한풀이’ 비슷한 감정을 가졌다고 보인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DJ는 당내 실권은 권 전 고문에게 부여했다. 반면 한 의원은 실권은 적었지만 당의 얼굴과 같은 자리에 기용됐다. 형식과 내용이 괴리됐던 셈이다. 이 같은 DJ의 용인술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인 듯이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내부갈등을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