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8월 11일 정운찬 국무총리의 퇴임식 모습. ‘세종시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표에게 무참히 깨졌던 그가 이제 친이계를 업고 ‘박근혜 대항마’로 돌아왔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런 친이계의 ‘반박기류’는 한때 꺼진 불이었던 정운찬 전 총리에 대한 대권 불씨 살리기로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일요신문>은 정 전 총리가 지난 10월 말 저녁 광화문에서 첫 번째 대권 도전 관련 모임을 개최한 사실을 포착했다. 이 자리는 정 전 총리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나서는 첫 번째 모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청와대 행정관급 인사가 이 모임에 직접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져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정운찬 띄우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는 최근 박근혜 전 대표가 쇄신파를 등에 업고 본격적인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 전략에 나선 가운데 친이 직계가 정운찬 재부상 카드로 맞불을 놓는 대권 전초전의 성격을 띤다고도 할 수 있다. 물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친이계의 정운찬 전 총리 띄우기 전략과 그의 대권도전 프로젝트를 따라가 봤다.
정운찬 전 총리가 주도하는 한 모임이 지난 10월 30일 저녁 7시 광화문 모처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각계 인사 3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정치인은 한 명도 없고 전부 외곽단체에서 활동하는 중립성향의 대외활동가들이라고 한다. 이 모임의 성격은 정 전 총리가 대권도전 출발에 앞서 향후 핵심적인 역할을 할 지지자들과 가지는 상견례 자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정 전 총리가 이런 외부모임은 처음 가지다 보니까 굉장히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정 전 총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서로 안면이나 트자고 해서 간 모임이다. 현재로선 그분이 조금 (대권도전) 그럴 마음이 있다는 정도를 보이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밥 한번 먹은 것뿐 아직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온 단계가 아니라 조심스럽다. 두 번째 만남은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또 한번 모이자고 했고 진도가 많이 나가면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총리는 자신의 ‘첫 번째’ 대권도전 관련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자신과 일면식이 없는 사람도 참석 확인을 한 뒤 일일이 직접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전화를 받지 못하면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해 ‘그 단체가 어떤 일을 하는 곳입니까. 많이 도와주십시오’라며 깍듯하게 협조를 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정 전 총리의 주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치권 관계자 A 씨는 이에 대해 “지금까지 알던 점잖은 서울대 교수 이미지의 정 전 총리가 아니라 뭔가 결심을 크게 한 듯 전화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어 전화를 받는 사람도 ‘옛날 생각하던 소극적인 정운찬 총리가 아니네’라는 말도 하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정운찬 전 총리 스스로 만든 대권 도전모임이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의 A 씨는 이에 대해 “첫 모임에 청와대 행정관급 인사가 2명 참석한 것으로 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교감 없이 정 전 총리가 독단적으로 대권 모임을 만들 리는 없다. 이 대통령이 아직 정 전 총리를 대권주자로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와의 연결고리는 또 있다. 지난 10월 말 첫 모임을 가진 정 전 총리는 며칠 뒤 산행을 계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첫 모임 때 참석했던 멤버 그대로 단합대회 성격의 모임을 가지려고 했던 것. 하지만 정 전 총리가 갑작스런 일정이 생겨 산행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앞서의 A 씨는 이에 대해 “모임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정 전 총리가 청와대의 긴급 호출로 산행을 갑자기 취소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독대를 위해 급히 행사를 취소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 전 총리의 이 대권 관련 모임은 오는 16일에 두 번째로 개최된다고 한다. 기존 멤버에 참석 인원도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번에도 청와대에서 행정관 1명이 모임 조율을 위해 참석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20일에는 1차 모임 때 취소된 산행이 예정돼 있다고 한다. 앞서의 A 씨는 이에 대해 “이 행사는 정 전 총리의 단순한 사모임이 아니다. 청와대와 조율 아래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대권 도전 프로젝트의 첫 단추다. 앞으로 정 전 총리의 행보를 눈여겨보라”고 말했다.
한편 정 전 총리는 이 모임과 관련,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난 번 모임은 커다란 의미는 없다. 주변에서 알고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어서 지인 소개로 만났는데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다. (총선-대선과 관련해)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활동한 적도 없다. 일종의 사적인 모임으로만 알아 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 전 총리가 왜 이 시점에서 ‘또 다시’ 부상하는 것일까. 세종시 정국을 이끌며 박근혜 저격수로 나섰던 정 전 총리는 그 시도가 무참히 깨지면서 대권구도의 뒤안길로 떠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대권주자의 위상에 상처를 입은 정운찬 전 총리의 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서울대 교수인 안철수 바람에 양력을 다시 얻은 셈이다.
특히 그의 대권 도전은 안철수 돌풍에 이은 박근혜 불가론의 논란 속에서 재잉태된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최근 친이계 내부에서는 안풍의 파괴력을 실감한 뒤 안철수 대항마 찾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지금 한나라당은 패닉 상태다. 의원들이 공천 때문에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박근혜를 이대로 믿으면 되겠느냐’라는 공감대는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다. 친박은 소장파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패배의 후유증을 수습해 보려하지만 역부족으로 보인다. 박근혜 카드는 소멸 수순에 접어들었다”라고 전제하면서 “한번 뜬 안철수 열풍을 기존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막기는 불가능하다. 세대 간 투표성향이 굳어지고 있고, 참신성과 표의 확장성 등 어떤 면을 비교하더라도 백전백패 구도다. 더구나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는 다시 안 교수에 크게 밀리고 있다(<동아일보>가 지난 11월 4~8일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양자 대결 구도의 내년 대선 여론조사에서 안 교수의 지지율은 47.7%,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38.3%로 9.4%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박 전 대표로는 절대 끌 수 없는 ‘안풍’을 정운찬 바람으로 잡을 수 있다고 본다. 안철수 교수가 뜨지 않았다면 정운찬 카드는 사멸 수순으로 들어가겠지만 안 교수가 부상함으로써 정 전 총리의 경쟁력도 재평가될 수 있다. 이념면에서 두 사람은 거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정 전 총리가 동반성장을 일관되게 외치고 있으며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안 교수의 약점인 행정경험 면에서도 정 전 총리가 훨씬 앞선다. 도덕성에서 다소 밀리긴 하지만 대선 국면이 다가올수록 안풍의 거품이 꺼질 것으로 예상해보면 두 사람은 박빙의 승부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을 잘 되새겨 보라”고 말했다.
‘정운찬 재부상’은 친이계의 박근혜 죽이기 맞춤형 카드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여권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최대의 위기에 빠져 있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12월 13일 이전에 제3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신당 창당을 선언한 상태다. 여권의 반박세력이 ‘박근혜호’를 버릴 때 근거지를 미리 마련해둔 셈이다.
박 이사장은 정운찬 전 총리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등을 영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정 전 총리의 본격 대권활동과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친이계로서는 박세일의 당과 정운찬의 대권주자 카드를 동시에 내세워 대안부재라는 골칫거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정치권의 한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정운찬에 대한 재평가와 다시 띄우기는 그동안 박근혜 대세론에 허우적거리던 친이계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박 전 대표 밑에서 공천학살을 당하느니 제3 세력 규합-창당과 안철수 대항마로서의 정운찬 대권주자 띄우기로 탈출구를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찬의 재부상은 여권 내분의 불길을 전 방위로 확산시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물 위에선 ‘그’가 전투모드
한나라당의 한 친이계 의원 보좌관은 “김문수 지사는 그동안 친이계와의 교류를 꾸준히 이어오며 박근혜 전 대표의 위기가 찾아올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골수 친이계’는 계속해서 다른 주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안철수 원장만큼 매력적인 외부 인사를 영입하지 못하는 한 현재로선 김문수 지사와 정몽준 전 대표가 가장 유력한 주자 아니겠느냐”라고 설명했다. 김 지사로서는 박 전 대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차기 대권주자로 나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무차별 공격의 선두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 지사는 쇄신파의 당 개혁 주장에 대해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는 있으나 이들 쇄신파가 박근혜 전 대표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쇄신파 대신 ‘반박계’와 규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반박계’ 중에는 최근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는 이재오 정두언 의원 등 한 때의 ‘골수 친이계’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구심점을 잃은 친이 세력들이 김 지사를 구심점으로 재기를 도모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 지사는 자신이 뜨기 위해 ‘공천 개혁’을 박 전 대표와의 전투에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영남권 물갈이 대상에는 친박계 의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당 개혁을 위해선 물갈이를 시행해야 하지만 친박계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박 전 대표로서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다. 김 지사가 당 개혁을 명분으로 물갈이론에 힘을 실으며 박 전 대표를 압박해 갈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 지사는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비판으로도 ‘자기 부상’을 도모하고 있다.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 등 서울시와 경기도가 연계되어 있는 정책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 지난 4일엔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서울시의 버스요금 인상 연기 검토’ 재고를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박 시장을 겨냥한 발언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김문수 지사가 야권의 상징적 주자로 떠오른 박원순 시장과의 경쟁체제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한 일각에서는 “서울시 정책에 밀려 자칫 경기 지사로서의 ‘공적’에 흠집이 갈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도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