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규 부회장(왼쪽)과, 현정은 회장 | ||
그러나 한 달 만에 귀국한 그는 현대가 대북사업의 유일창구임을 역설하며 현대의 대북사업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현대측도 김 부회장의 대북사업 참여의 길을 열어놓을 뜻을 밝히면서 외관상 양측은 화해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현정은-김윤규 갈등은 봉합된 것이 아니라 제2 라운드를 맞이하고 있다는 관측을 낳고 있다.
김윤규 부회장은 현대의 대북사업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소명 기회를 달라는 입장이다. 비리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사실상 대표이사직 복귀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부회장은 현 회장과의 회동도 원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미 김 부회장을 비리경영인으로 지목한 현 회장이 그를 만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현대측이 김 부회장에게 대북사업 참여의 길을 어느 정도 열어줄 가능성은 높아진 상태다. 최근 김 부회장 문제 논의를 위한 사장단 회의에서 그의 대표이사직 복귀는 불가해도 그에게 일정 부분 힘을 실어주는 방안을 적극 모색중인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현대그룹은 김 부회장 퇴진을 공표할 당시에도 김 부회장의 대북사업 참여 여지를 남긴 바 있다. 그러나 북측의 김 부회장 인사 관련 유감 표명 이후 현정은 회장은 ‘비리경영인’ 운운하며 김 부회장의 대표이사직 복귀 불가 방침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최근 김 부회장에 대한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 논의 결과는 현 회장과 현대그룹의 김 부회장에 대한 태도가 제법 누그러진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김 부회장에 대한 인사 발령 이후 북측은 김 부회장 거취 문제를 트집 잡아 파장을 일으켰다. 정부의 중재로 수습국면에 들어갔지만 대외적으로 김 부회장이 자신의 ‘임면권자’를 현대그룹 회장이 아닌 국내 정치권과 북측 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김 부회장과 현대그룹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북한의 ‘김윤규 고집’에 대해 여권의 한 인사는 “중국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권교체가 민주주의 국가만큼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외교 협상 창구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북측에서 볼 때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일해온 김 부회장의 자리가 커보였을 것”이라고 평한다. 일각에선 김윤규 전 부회장과 북측이 외부에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김 전 부회장에 대한 ‘집착’이 상례를 벗어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북측의 김 부회장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큰 탓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북측이 김 부회장 건을 빌미로 ‘현대그룹 길들이기’ 차원에서 현 회장의 애를 태운 것”이란 관전평을 내놓는다. 이는 현대그룹이 대북사업 합의과정에서 북측에 지급하기로 한 돈을 일부 지급하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에 기인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어쨌든 북측이 김 부회장의 신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창구 중 하나로 김 부회장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현 회장이 김 부회장 영향력 없이 독자적으로 북측을 만족시킬 묘책을 찾을 경우 북측과 김 부회장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관측을 가능케 한다. 이에 따라 현-김 자존심 대결 2라운드는 대북 로비전을 중심으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인맥에선 여전히 김 부회장이 우위를 점하지만 대북 투자의 키를 쥐고 있는 그룹 총수인 현 회장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정부의 중재로 현대의 대북사업이 다시 정상궤도를 찾아가고 있지만 정·재계 다수 인사들은 현정은 회장과 김윤규 부회장 간의 갈등이 쉽사리 봉합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대북사업 문제로 북측에 갔던 현대그룹과 정부측 인사들 사이에서 ‘김윤규 왕국’이란 말이 나왔던 것에 현 회장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남편인 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불러온 원인이 무리한 대북사업 진행이었다는 점에서 김 부회장에 대한 현 회장의 강경대응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현 회장은 얼마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면담 이후 백두산 관광사업권을 따내고 나서 김 부회장 인사를 단행해 명실상부한 대북사업 주체가 현 회장 자신임을 알렸다. 그러나 김 부회장의 대북 영향력 여부를 떠나 김윤규 부회장의 이름 석자가 아직 대북사업 논의 과정에서 계속 오르내리는 만큼 그의 그림자가 지워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대북사업을 둘러싼 현정은-김윤규 간 자존심 대결의 종착역은 아직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