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박해일을 다시 만났다. 지혜로운 장수, 지장(智將) 이순신으로 한산대첩에 참전한 그는 ‘명량’에서 용장(勇將·용맹스러운 장수)의 면모를 보여줬던 최민식과는 또 다른 결로 전장에 선다. 감정의 높낮이가 없고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가 최후에 이르러서야 이를 폭발시키는 박해일의 이순신은 김한민 감독의 주특기인 대형 액션 신과 어우러지며 관객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님으로 분한 최민식 선배님이 불같은 기운을 활용하셨다면, ‘한산’에서는 한산해전만이 보일 수 있는 또 다른 이순신 장군님의 어떤 기질을 제가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분의 기록을 찾아보면서 말수도 적으셨고, 희로애락 감정의 표현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셨다는 표현을 봤는데 특히 7년 전투라는 그 길고 고단한 시간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느낌이겠다 싶은 게 있었어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쓰러져가는 나라를 버텨 내는 그 강인한 기운, 그렇지만 그런 걸 혼자 삭히는 느낌이요.”
‘한산’에서의 이순신은 담담하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 수세에 몰린 전장의 상황,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모험을 앞에 두고도 그는 흔들림이 없다. 기세등등한 왜적들이 거세면서도 야성적인 기운을 두른 채 스크린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박해일의 이순신은 정(靜·고요)으로 머물며 작품에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아주 적은 대사와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관객을 움직일 수 있는 박해일이란 배우가 가진 절제성이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명량’에서의 명대사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면 ‘한산’에서 관객들이 꼽은 명대사는 “발포하라”였다. 박해일의 이순신이 120여 분간 응축해 온 고뇌와 감정이 산산조각으로 폭발하는 대사이기도 했다. 전투 신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사인 만큼, 그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박해일은 회상했다.
“‘발포하라’라는 대사 신은 한 네다섯 번 찍었던 것 같아요. 한 자리에서요.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어요. 그 말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발포하라”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의 감정에 집중했거든요. 그 감정을 담아 대사를 내뱉는 에너지를 모아야 해서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감정이 올라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다들 충분히 기다려주셨어요. 감독님께서 ‘발포하라’라고 말할 때, 박해일이란 배우가 이순신을 하면서 그 대사를 할 때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거든요. 아마 ‘명량’에서도, ‘노량’에서도 같은 대사가 있을 테니 그 차이를 관객 분들이 즐겨주시면 좋겠어요.”
왜군 적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의 변요한과는 이번이 첫 호흡이었다. 해전의 특성상 우두머리가 맞부딪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촬영 현장에서도 박해일의 조선 수군과 변요한의 왜 수군은 자주 볼 기회가 없었다고. 대신 수군답게(?) 횟집에서 종종 만나 진영 체크를 했다는 게 박해일의 이야기다.

앞서 ‘헤어질 결심’에 이어 ‘한산: 용의 출현’까지 약 두 달 간격으로 관객들 앞에 서는 박해일은 이런 경험이 정말 처음이라며 얼떨떨해 했다. 2019년부터 2021년 봄까지 세 작품을 연달아 준비해 오면서 제대로 된 ‘번아웃 증후군’(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돼 무기력증, 우울증 따위에 빠지는 현상)을 경험했다고 담담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부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차분할 수 있는 건 영화인으로서 작품에 대한 애정과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연달아 작품을 촬영할 수밖에 없는 스케줄이어서 촬영이 끝나고 좀 탈이 났었죠. 제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내주는 시간이 필요한데 (없어서)…. 특별히 그런 번아웃이나 우울을 해결할 방법을 찾진 않았고요, 저는 좀 방치하는 편이라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죠(웃음). 모든 배우들이 다 겪는 거라 저라고 특별한 건 없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또 이런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결이 다른 장르의 영화 둘을 한 시즌에 관객들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한 부담이고 조심스러움이 있거든요. 반면 어떤 면에서는 한 번의 종합선물세트를 확 풀어서 내미는 느낌이라 좋기도 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