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준표 대표(작은 사진)의 사퇴로 지도부 공백을 맞은 한나라당이 박근혜 전 대표 체제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박 전 대표가 충분한 ‘숙고’의 시간이 없이 외부요인에 의해 계속 휩쓸리며 ‘뒷북 수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홍 대표 낙마과정도 복기해 보면 일부 쇄신파의 탈당 압력에 박 전 대표가 일단 숨을 돌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대리인’을 내친 것으로 보인다. 쇄신파는 붙들어 놓을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친박계 내부의 분열과 친이계(재창당파)의 본능적인 반발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런 연쇄적인 돌발상황은 박 전 대표의 전력을 급속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외부인사 영입 등을 통해 자신도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당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외부견제에 더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홍준표 대표의 사퇴를 겪은 한나라당의 ‘12·9 당란’, 그 막전막후를 따라가 봤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핵심세력들은 지난 12월 4일 서울시내 모처에서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앞날을 논의했다. 여당 의원실 9급비서가 선거방해를 목적으로 선관위 홈페이지를 디도스 공격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진 바로 다음이었다. 이때 소장파 의원들은 직감적으로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10·26 부정선거’라는 오명이 여당에게 낙인 찍히는 순간 그 오물단지에 몸을 담은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더렵혀질 절체절명의 순간을 깨달은 것이다.
이들은 이날의 막걸리 자리에서 앞으로 끝까지 단일대오로 함께 할 것을 결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구체적인 행동계획은 세울 수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번질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일부 의원은 선도 탈당 이야기도 꺼냈지만 “일부는 당 밖에서 일부는 당 안에서 쇄신을 논의하는 게 이상하다”는 모양새를 우려해 잠시 유보했다는 전언이다.
일요일 막걸리 자리 다음날 기자는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와 통화를 했다. 그는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마음의 결심이 섰다. 디도스 공격 사건은 최구식 의원이나 그 윗선의 문제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게임은 끝났다. 조사도 필요 없고 그 자체로 당 해체의 사건이라고 본다. 동료들에게 ‘싸울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다. 구체적 방법은 아직 세우지 않았다. 탈당 아니면 자폭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 지난 7일 원희룡 유승민 남경필 등 지도부 3인이 최고위원직 사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소장파 핵심그룹은 이렇게 서로 합의를 하고 다음날인 12월 7일 아침 원희룡 의원에게 남 의원 등이 ‘움직인다(사퇴)’고 통보를 했다. 이때 원 의원은 이미 원칙적으로 최고위원직을 던지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기 때문에 설득의 시간이 필요 없었다. 이와 동시에 남경필 의원은 홍준표 대표실로 가서 최고위원직을 던지겠다며 최후통첩을 했다. 집권여당 사상 유례가 없는 3명의 최고위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당 지도부를 이탈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홍 대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쇄신안을 내놓으며 재신임을 관철시켰다. 3명의 최고위원이 자리를 던졌지만 그는 버텼다. 이 과정에서 홍 대표의 의중을 흐리게 했다며 논란이 됐던 사람이 친박계 핵심 A 의원이었다. 홍 대표 체제 붕괴의 결정타가 됐던 게 유승민 의원의 최고위원직 사퇴였다. ‘박심’ 여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각에서 A 의원이 ‘박심’을 잘못 전달해 친박계가 분열하는 계기가 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런 친박계의 내분은 홍준표 사퇴 정국에서 박 전 대표가 손실을 입은 첫 번째 사례다. 그 까닭은 친박계가 ‘박심’ 의중을 두고 두 패로 나뉘어 분열했기 때문. 유승민 의원이 최고위원직을 던진 것은 “박 전 대표의 의중이 아니라 자신이 흐름을 읽고 ‘내 판단이 옳습니다. 세상 흐름은 이렇게 갑니다’ 하며 사퇴를 하고 보스에게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소장파 관계자 표현).
하지만 A 의원이 유 의원의 뜻을 잘 못 읽고 친박계에 전화를 다 돌려 그의 ‘거사’를 돌출행동이라고 깎아내렸던 것이다. 홍 대표도 A 의원을 통해 ‘박심’을 읽었고 다음날 쇄신안 발표를 강행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친박계 원로들도 그에 동조했지만 결국 이것이 A 의원의 독단적인 ‘해석’이었던 것으로 드러나며 ‘박심’을 두고 친박계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박 전 대표가 친박계 집안단속마저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홍 대표의 퇴진마저 불러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리더십의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3명의 최고위원이 직을 던질 때만 해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이 홍 대표가 그 다음날 박 전 대표의 백업을 믿고 쇄신안을 무리하게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친박계 핵심 A 의원이 박-홍 연대를 끝까지 유지시키기 위해 ‘박심’을 팔아 왜곡을 했을 개연성이 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될 때까지 메시지 관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서 박 전 대표는 점점 등을 떼밀리며 홍 대표 사퇴와 자신의 전면부상이라는 예기치 않은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박 전 대표에는 두 번째 악재다. 이번 쇄신정국에서 박 전 대표는 자신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상황 컨트롤을 할 수 없었다. 외부의 돌발 변수에 그저 끌려가며 임시방편으로 대처하다가 결국 전면부상이라는 최후의 카드마저 꺼내게 되는 형국으로 내몰렸다.
박 전 대표가 쇄신파의 결심과 민심의 흐름(최측근 유승민 의원마저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는 역류 현상)을 제대로 포착했다면 홍 대표가 쇄신안을 발표하게 내버려두는 상황만은 막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결국 홍준표라는 또 다른 방패막이마저 잃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박 전 대표는 쇄신파 몇 명의 압박에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당내의 쇄신 아이콘인 ‘남경필 정태근 정두언 유승민 김성식’의 5인방 압박에 박 전 대표는 사실상 투항을 한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일부 소장파가 선도탈당을 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박 전 대표도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것으로 안다. 홍 대표 쇄신안으로 안 된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을 것이다. 그때 박 전 대표 측에서 소장파 핵심그룹에게 ‘채널을 열자’고 제안을 한 것으로 안다. 뒤늦게 소장파에게 ‘요구조건이 뭐냐’며 사태진압을 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구체적인 얘기는 오가지 않았지만 확실히 박 전 대표 측에서 소장파에게 그런 오퍼를 보낸 것은 팩트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대표가 취임 5개월 만에 사퇴한 것은 ‘12·9 당란’으로도 불릴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런 중대한 정치적 고비에서 한 번도 자신의 의중대로 혼란과 갈등을 정리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미성숙한 이유만 내세우다 결국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전면부상을 하게 생겼다. 소장파로부터는 권력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친이계는 재창당을 하자며 윽박지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친박계도 내분에 휩싸였다. “이 요구 저 요구 다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차 포 떼고 총선 대선에 나가는 박근혜를 보게 생겼다”는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디도스 정국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박근혜 전 대표다. 디도스 공격이 박근혜를 견제와 흔들기의 무대로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 일각에선 박근혜 전 대표와 안철수 원장의 연대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
‘박근혜+안철수’ 상상은 자유~
박근혜 전 대표가 당 쇄신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여권 발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솔솔 나오고 있다. 홍준표 대표 낙마 과정에서 박 전 대표는 쇄신파와의 연대를 재확인했다. 소장파는 현재 박 전 대표에게 ‘당을 살리기 위해서는 박 전 대표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쪽에서 얼마나 진전된 카드를 내느냐에 따라 소장파도 응답을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상태다.
사실 박 전 대표에게는 몇 안 되는 소장파가 향후 총선-대선을 헤쳐 나가는 데 꼭 필요한 핵심세력이다. 고성국 정치평론가는 이에 대해 “소장파가 탈당을 하면 누가 죽느냐 하면 바로 박 전 대표다. 그나마 국민들이 소장파들을 한나라당의 희망이라고 보는 편인데 몇 명 안 된다고 박 전 대표가 그들을 내치면 대선가도에 나갈 수가 있겠느냐. 절대 못 간다. 이 힘겨루기에서 홍 대표가 나가떨어진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계속 소장파를 붙들어 둘 경우 안철수 원장 측과의 연대도 그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소장파는 그동안 법륜 스님과 교류를 하며 친분을 쌓아왔고 그 일부는 윤여준 전 장관과도 깊은 관계에 있다. 그들을 매개로 소장파가 안철수 원장 측과의 연대를 모색해볼 수 있는 것이다. 소장파의 한 초선의원은 “안철수 원장은 정치성향 상 한나라당의 소장파와 더 가깝다고 본다. 우리가 저쪽과 통할 수 있는 강력하고 신뢰할 만한 ‘다리’만 있다면 연대를 타진해볼 계획이다”고 말했다.
향후 여권은 박근혜-쇄신파-시민단체의 연합군으로 권력구도가 재편될 전망이다. 3군 연합의 주류에 재창당을 주장하는 친이계(이재오-정몽준-김문수 연합군)가 비주류로서 대립하는 형국으로 여권의 권력구도가 다시 바뀌는 것이다.
친이 성향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여당 발 정계개편은 친이계가 우선적으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친이계가 박세일 전 서울대 교수가 이끄는 중도세력 신당과의 연대를 전제로 탈당을 결행하는 시나리오를 예상해볼 수 있다. 친이계의 이탈로 전력이 약화된 박 전 대표가 외부수혈을 얼마나 해내느냐에 따라 정계개편의 승패가 판가름 날 것”이라고 말했다.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