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달 14일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쇄신파’ 의원들과 당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먼저 그때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차떼기와 탄핵으로 위기에 몰린 2004년은 박 전 대표에게 십자가를 지웠지만 균형감각의 민심이 그녀를 지켜줬다. 하지만 개혁과 변화에 실패해 민심을 잃은 이번 한나라당의 위기는 ‘영광의 2004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갑자기 끌려 나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지만 쇄신에 대한 그 어떤 컨센서스(구성원의 총의)도 마련되지 않아 단독플레이에 대한 독박을 써야 할 입장이다. 일부 소장파와 친이계의 의뭉한 비협조도 풀어야 할 숙제다. 일각에서는 “나무 위에 던져놓고 혼자 춤춰 보라는 꼴”이라며 박 전 대표의 고립무원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박근혜 전 대표의 앞날을 미리 스크린해 보았다.
“안돼~”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KBS 2TV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자주 나오는 유행어다. 비상대책위가 위기를 맞아 대책을 세우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안 된다는 말만 반복된다. 적극적인 대책 없이 핑계만 대는 관료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12월 19일 한나라당에도 비상대책위원회가 뜬다. 개그가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가 직접 나서는 ‘심각한’ 위기대응 최고의결기구다. 집권여당이 지난 10·26 재보궐 선거 대패 이후 두 달여 동안 난리를 피우며 만들어낸 묘책이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를 위한, 박근혜의’ 비상대책위원회다. 물론 12월 15일 한나라당 의총 때 박 전 대표가 2년 7개월 만에 참석, ‘박비어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강력한 리더십으로 위기를 헤쳐 나갈 힘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여당 대부분의 의원들도 “일단 지켜보자”며 비대위 출범에 기대를 거는 눈치다.
하지만 여권의 ‘지각’ 있는 관계자들은 박 전 대표의 당 접수 과정을 지켜보며 “민심과 따로 노는 한나라당에게서 마지막 희망마저도 놓았다”는 절망이 나오고 있다. 먼저 헌법기관인 의원들이 쇄신에 대한 토론과 협의를 거쳐 공감대를 나눈 뒤 박 전 대표에게 건의하는 ‘민주적’ 방식이 아닌, ‘우리는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며 유력주자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 자체가 비대위의 ‘뻔한’ 앞날을 예상케 한다는 지적이 많다.
수도권의 한 정치학자는 이에 대해 “한나라당이 위기나 민심이라는 단어를 아는지나 모르겠다. 비대위가 출범하는데 그 어떤 치열한 토론과정도 없었다. 계파별 이해관계만 난무했다. 한나라당은 스스로를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민주적 시스템이 이미 무너졌다. 국민들이 ‘박근혜만의 비대위’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다. 의원 개개인이 자신들의 권리를 발로 차고, 최고 실력자에게 두 손 들고 예속당하는 것 아니냐. 이것이 21세기 민주적 정당의 모습인가. 결국 제왕적 리더십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돼 있다. 의원들이 제왕적이라고 비판해서 당권·대권이 분리된 것인데 다시 그 체제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결국 의원들이 ‘박근혜 핫바지’ 하겠다며 자복한 것이 이번 쇄신정국의 결말이다”라고 말했다.
이 학자는 이어 “박 전 대표는 의원들에게 문 걸어 잠가 놓고 쇄신에 대한 결론을 가져오라고 했어야 했다. 소장파와 1시간 잠깐 만나 얘기 끝났다며 비대위원장 자리를 덥석 잡는 것을 보고 ‘한나라당도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성난 민심이 한나라당 쇄신의 종결자가 될 것으로 본다”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정치전문가들이나 소장파 일각에서 ‘박근혜 비대위’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보는 이유는 “민심을 등에 업은 비대위가 아니라 자기개혁을 포기한 그들만의 지지로 출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계파 간 갈등이 잠복된 채 비대위가 출범했다는 것도 부정적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원희룡 의원과 정두언 의원은 이미 비대위 속의 야당을 자처하고 나섰다. ‘잠재적 탈당군’인 이들은 각각 “재창당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모아 (비대위 체제에서) 토론해 나가겠다”, “달라진 것은 박 전 대표의 의원총회 출석과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이라는 정치적 수사뿐이다. 박 전 대표의 실천 여부를 지켜보며 백의종군하겠다”라고 밝히며 각을 세우고 있다.
최근 친이계 소장파 김성태 의원도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으로 나섰지만, 만능한 신이 아닌 만큼, 비대위 구성과 쇄신안 실천 과정에서 어떤 균형성을 유지하고 어느 정도 진정성을 담아내는지 지켜봐야 한다. 지원하면서도 냉철하게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박 전 대표의 재창당 수준의 쇄신의지를 별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수준의 쇄신안을 박 전 대표 스스로가 내놓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불통공주’의 이미지가 고착화돼 온 터라 단 시일 내에 열린 리더십을 보여주기가 불가능할 것이란 얘기다.
정두언 의원 측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여전히 당내 계파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친박 해체만 한다고 그 갈등이 없어지느냐. 박 전 대표가 비대위를 출범시켜도 여전히 당을 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계파끼리의 싸움이 또 붙게 돼 있다. 인재영입도 회의적이다. 박 전 대표가 데려올 사람인데 얼마나 객관적인 인사기준으로 영입을 할 수 있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사실 소장파 일부가 박 전 대표의 쇄신안을 우려하는 대목의 핵심도 바로 인재영입 부분이다. 그리고 비대위 구성은 그 첫 번째 관문이 될 전망이다. 초 계파적으로 영입을 해야 하는데 시간과 인재풀이 절대 부족하다는 게 친박계 내부의 전언이다.
친박계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그동안 박 전 대표는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만한 인사들과의 접촉 등 하드웨어 쪽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런데 갑자기 비상상황이 발생하면서 일이 꼬인 측면이 있다. 백지상태에서 비대위를 구성해야 하는데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인재풀도 광범위하지 않다.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릴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측은 “참신하고 전문성을 갖추고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성향의 인사도 다양하게 찾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면면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소장파 내부에서는 “재창당이라는 합일점을 만들어 놓고 문을 개방해야 인재들이 몰려올 텐데 어정쩡하게 개문발차 한 상태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오려고 하겠느냐”며 회의적 반응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라는 ‘여왕’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게 지금 한나라당이 처한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참석했던 의총장 분위기는 희망 일색이었다. 윤상현 의원은 주군 앞에서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발언, 고흥길 의원이 ‘아부’ 자제를 주문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한나라당 의원들의 이런 ‘근거 없는’ 희망은 물론 지난 2004년 박근혜 전 대표가 보여준 위기대응 능력과 그 결과물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는 2003년 차떼기 파동과 2004년 탄핵 정국으로 최대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을 구해내기 위해 당 대표로 나섰다. 천막당사로 이름 붙여진 위기대응 전략은 합격점을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탄핵 역풍 속에서도 121석이라는 예상 밖의 의석을 얻어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그 여세로 대선 후보 경선에까지 나아갔다. 지난 12·15 의총장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2004년의 선거 여왕을 떠올리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일단 원희룡 의원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그는 이에 대해 “탄핵 때는 박 전 대표의 참신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통과 친박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며 ‘어게인 2004’의 실현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사실 박 전 대표는 탄핵정국에서 진보의 총선 싹쓸이 가능성에 대한 보수층의 경계심 덕을 톡톡히 봤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박 전 대표는 정계입문 6년째의 신선함에다 핍박 받는 공주의 이미지를 등에 업어 상당한 동정표를 흡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게 정치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일단 가장 큰 차이는 현재의 정국이 안철수 바람이라는 최대의 변수가 덮치면서 박근혜 브랜드가 올드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그는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정권 2인자의 ‘권력자’로 각인돼 동정표마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특히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에 실패할 경우 비대위 정국과 내년 총선에서 현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심판의 덤터기마저 쓸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선거의 여왕’ 박 전 대표가 이번에도 그들을 구해줄 것으로 믿고 ‘묻지마 밀어주기’를 해 준 것이 이번 비대위 출범의 또 다른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의 막이 올랐다. 동떨어진 민심, 계파 간 갈등 내연, 2004년과 판이하게 달라진 정국상황 등으로 비대위가 과연 여왕의 뜻대로 굴러갈지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들이 많다. 박근혜 전 대표가 열린 자세로 비상대책위원회를 운영하지 않는 이상, 쇄신의 충언들이 여왕의 고집스런 목소리에 계속 묻힐 것이다.
“안돼~”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갈 사람은 안 가고 왜 초선이…
내년 4·11 국회의원 총선거와 12·19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뼈를 깎는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야권도 예외일 수 없다. 변화와 쇄신의 진정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인적쇄신.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민주통합당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이다. 기득권을 내려놓을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는 ‘올드 보이’들 때문이다.
야권에서 기득권 포기의 물꼬는 지난 12일 정장선 전 민주당 사무총장이 텄다. 경기 평택을 지역구에서 3선 의원을 지낸 그는 국회에서의 여야 충돌과 야권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민주당 임시 전국대의원대회 폭력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4일에는 호남 지역구 의원 중 처음으로 장세환(전북 전주완산을·초선)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고, 15일에는 김부겸(경기 군포·3선) 의원이 사지나 다름없는 대구 출마를 선언했다.
이들의 결단을 지켜본 민주통합당 사람들은 착잡한 표정이다. 정작 가야 할 사람은 안 가고 남아야 할 사람들이 떠나게 됐다는 것이다. 50대의 전도유망한 의원들이 총선·대선 승리를 위해 ‘죽는 길’을 선택했는데도 이들의 선배인 원로급 의원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이다.
민주통합당 의원 구성을 뜯어보면 왜 민주통합당 현역 의원 평균연령(57.7세)이 한나라당(57.3세)을 웃도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영진(광주서을·64) 김충조(비례·69) 박상천(전남 고흥보성·73) 의원 등 5선 의원 3명과 문희상(경기 의정부갑·66) 손학규(경기 성남분당을·64) 이미경(서울 은평갑·61) 이석현(경기 안양동안갑·60) 정세균(전북 무안진안장수임실·61) 천정배(경기 안산단원갑·57) 의원 등 4선 의원 6명 중 천 의원만이 60세를 넘지 않았다. 초선~3선 의원 중에서도 강봉균(전북 군산·68) 홍재형(충북 청주상당·73·이상 3선), 김성순(서울 송파병·71) 박지원(전남 목포·69) 신낙균(비례·70) 최인기(전남 나주화순·67·이상 재선), 김학재(비례·66) 서종표(비례·66) 신건(전북 전주완산갑·70·이상 초선) 의원 등 9명이 65세를 넘었다. 이들만이 아니다. 김기석(65) 김덕규(70) 김정길(66) 김태랑(68) 박상규(73) 서재관(65) 심재권(65) 유필우(66) 이상수(65) 이훈평(68) 장복심(65) 정균환(68) 정대철(67) 등 65세 이상 전직 의원 상당수가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이 중 김태랑 정균환 정대철 전 의원은 민주통합당 대표에도 도전할 태세다.
이들은 나이와 선수로 물갈이 대상을 정하는 게 억울하겠지만 당내 반응은 차갑다. 특히 다선의원들에게는 ‘선수만 채워 국회의장이나 부의장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싸늘한 시선이 꽂히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