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권 조정안과 관련, ‘벤츠 여검사’ 사건으로 기세를 올리던 경찰이 디도스 졸속 수사 의혹으로 잔뜩 풀이 죽었다. 사진은 검찰 소환을 앞둔 조현오 경찰청장. |
경찰은 10·26 보궐선거 당시 선관위 홈페이지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한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수행비서 공 아무개 씨와 관련한 조사를 마치고 12월 9일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수사발표를 통해 고작 스물일곱 남짓한 말단 비서에 불과한 공 씨가 아무런 대가 없이 단독범행을 기획한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특히 경찰이 공개한 내용 중 문제가 되는 것은 박희태 국회의장 전 비서 김 아무개 씨가 공격을 감행한 IT업체 대표 강 아무개 씨에게 1억 원을 건넨 사실이다. 경찰수사에 따르면 김 씨는 디도스 공격 시점을 전후로 강 씨에게 돈을 건넸으며 경찰수사가 본격화되던 11월께 다시 돈을 돌려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눈에 봐도 대가성이 의심 가는 대목이지만 경찰은 공격과 관련한 금전적 거래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야권에서 계속되는 추궁이 이어지자 경찰은 12월 15일, 다시금 금전거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빈대떡 뒤집듯 말을 바꿨다.
여기에 민주당 박영선 의원 등은 조현오 경찰청장의 조작수사 개입설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박 의원은 12월 15일 당 고위정책회의에서 “경찰이 마지막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청장실에서 발표문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조 청장을 직접 겨냥했다. 이날 열린 민주당 의원들과의 면담자리에서 경찰은 이에 대한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 이 자리에서 김진표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들은 사건의 의혹들을 조목조목 들먹이며 경찰 고위간부들을 강하게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자 조 청장은 12월 16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불끄기에 나섰다. 조 청장은 부실 및 조작수사 의혹에 대해 “의도적 축소, 은폐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으로 적극 부인했다. 그는 또한 수사결과가 계속 오락가락하는 이유에 대해 “수사팀이 12월 9일 우발적 단독범행으로 결론 냈지만 계좌통로와 거짓말탐지기 결과 등을 볼 때 단독 범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담당 수사팀이 여전히 단독범행주장을 굽히지 않아 내부서 격론이 벌어졌다”고 말하며 간담회에 참석한 담당 수사팀 책임자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막고 질책하는 민감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면 책임을 담당 수사팀에 떠넘기는 모습이었다.
어찌됐건 선관위 디도스 사태 수사권의 공은 한창 경찰과 수사권 조정안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검찰에게 넘어간 상태다. 검찰은 작심한 듯 수사 초기부터 수사관들을 보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경찰이 공 씨 관련 자료를 임의제출 형식으로 진행하는 등 소극적인 수사행보를 보이던 것과는 대치되는 모습이다.
검찰은 현재 경찰수사와 별개로 사건을 ‘전면 재수사’ 하겠다는 입장이다. 경찰과 조 청장으로서는 엄청난 압박이아닐 수 없다. 경찰의 수사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까지 추락한 시점에서 검찰이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수사결과를 밝혀내기라도 한다면 경찰과 조 청장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조 청장의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다. 임기 내내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동안 현 정권에 충실한 행보를 보여 온 그였다. 더군다나 정치권 안팎에서는 내년 총선 때 조 청장의 출마설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 검경 수사권 조정 토론회에 참석한 일선 경찰들. |
검경수사권 조정안을 놓고 상대적 약자 입장인 경찰이 유리한 여론몰이를 해야 했지만 경찰에 대한 여론도 좋지 못한 상황이다. 한동안 조 청장은 직선적인 언행으로 여론의 입방아에 오른 바 있다. 또한 최근 한미 FTA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영하의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시위자에게 물대포를 발사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경찰은 또 종로경찰서장 폭행사건과 관련해 사전 기획설 내지는 조작설이 제기되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여기에 디도스 부실수사 논란까지 부상하면서 경찰에 대한 여론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조 청장은 최근 검경수사권 조정안을 저지하기 위해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배수의 진’을 친 상태다. 한동안 내부에서 제기되는 자질론과 책임론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검찰과 정부, 여론에 결연한 의지를 표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최근 경찰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시각에 힘이 실리고 있다.
어수선한 경찰 분위기와는 달리 검찰은 호기를 잡은 듯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조 청장을 이달 말쯤에 소환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청장은 지난해 8월께 경찰 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연회에서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도중에 차명계좌가 발견돼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는 내용의 발언을 해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 발언 직후 노무현재단과 노 전 대통령의 유가족은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조 청장을 고소 및 고발한 상황이다. 경찰 일각에서는 검찰이 수사권 조정안 문제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조 청장 소환 카드로 압박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처럼 경찰과 조 청장 주변에는 온통 악재만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선관위 디도스 사태 부실 및 조작수사 의혹 타개와 검경수사권 조정안, 땅으로 떨어진 신뢰회복 등 쑥대밭으로 변한 경찰과 조 청장이 어떤 식으로 난관을 극복해 나갈지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