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걸고 결정한 감독 데뷔 “연기자로서 호감 떨어질까 두려웠지만 도전에 후회 없어”
영화 ‘헌트’를 준비하면서 배우 아닌 감독으로 스크린 앞에 선 이정재(50)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고 했다. 제작 기간 동안 ‘신과 함께’(2017), ‘사바하’(2019),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등 쟁쟁한 영화 작품에다 그의 배우 커리어를 또 한 번 정상의 정상으로 올려놓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까지 소화했다. 커리어를 모두 걸고 실패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진 않을까, 잠을 설치는 밤도 늘어났다.
“저는 연기만 오래, 또 열심히 한 사람이었잖아요. 연기를 계속 꾸준히 할 수 있는 상태에서 굳이 무슨 연출까지 하느냐, 특히 시나리오까지 자기가 썼다는데 도대체 이정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이정재가 이런 이야기를 들고 나왔을까 하던 사람들이 저의 실패를 본다면 연기자로서 호감도까지 떨어지지 않을까 했어요. 그런 공포감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일요신문과 만난 이정재는 ‘헌트’를 준비하며 가장 크게 느꼈던 중압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7년 이 작품의 원작 시나리오였던 ‘남산’(원제)의 판권을 구입하면서 시작된 ‘감독 이정재’의 삶은 4년여의 시간을 돌아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처음부터 이정재가 감독으로서의 창작 혼을 불태웠던 것은 아니었다. 좋은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기다리다가 제작이 무산된 뒤, 작품이 아깝단 생각이 들어 판권을 구매했다. 어느 좋은 감독님을 만나 제작과 연출을 맡길 수 있다면 ‘출연진’으로만 남고자 했지만, 이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고.
“첫 번째로는 그냥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게 잘만 고쳐지면 (정)우성 씨하고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시나리오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감독님들을 찾아 뵀는데 연이어 거절을 당했죠. 그러다 그냥 감독님을 찾는 데만 시간을 쏟지 말고 이런 방향으로 수정됐으면 좋겠다는 수정안을 제가 직접 쓴 뒤에 그걸 트리트먼트 형태로 감독님들께 보여드리면서 연출 제안을 했어요. 그럼에도 감독님 캐스팅이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그냥 트리트먼트가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쓰면 보고 해주실까 싶어서 계속 쓰다 보니 제가 온전히 시나리오를 쓰게 된 거죠.”
작품에 직접 손을 대고 나니 이번엔 이야기를 그려나갈 캐릭터들이 간절해졌다. 이왕 한다면 최고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만한 영화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의 영혼의 단짝, 정우성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헌트’에서 조직에 숨어든 북한의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해외팀 박평호(이정재 분)와 대립하는 국내팀 김정도는 그 비중으로 보나 무게감으로 보나 단연 중요한 캐릭터였다. 감독 이정재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대로 담겨 있는 캐릭터다 보니 애정도 깊었다고. 꼭 정우성을 캐스팅하고 싶어 삼고초려를 넘어선 ‘사고초려’까지 해야 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캐스팅은 정우성이 제일 힘들었죠, 당연히(웃음). 3번이나 거절을 했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원래도 수없이 작품을 거절 당해보기도 하고, 직접 거절을 하기도 해서 얄밉진 않았어요(웃음). 제가 ‘우성 씨. 진짜 할 거야, 안 할 거야!’ 하고 물어보면 ‘이 시나리오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하고 거절 당해서 ‘그럼 다른 사람한테 준다!’ 하는 대화가 계속 반복됐었죠. 우성 씨와 제가 ‘태양은 없다’(1999) 이후로 몇 번 함께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 시도가 다 성사되지 않았던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쓴 시나리오로 함께하게 돼서 더 서로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정재는 “이 점은 꼭 짚고 가고 싶다”며 정우성의 캐스팅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단순히 친분만으로 결정한 ‘인맥 캐스팅’이 아니었다는 것.
“제가 이런 거절 일화를 말씀 드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왜냐면 많은 분들이 저희 둘이 너무 친하기 때문에 ‘그냥 친해서 함께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텐데, 저희가 일을 할 때 정말 치열하고 깊이 고민한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거든요. 일에 있어서 그저 감정이나 친분 같은 것만을 이유로 하지 않는다고요. 우성 씨가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저한테 ‘이번엔 시나리오가 좀 잘 정리된 것 같은데요’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하면서 출연을 수락해줬어요(웃음).”
친구가 아닌 감독이자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직장 동료이면서 동업자였기에 정우성을 바라보는 이정재의 눈은 깐깐했다. 정우성이 나오는 모든 신에서 그가 가진 최대치의 매력을 뽑아내고 싶었다는 이정재는 감독으로서도, 또 그와 함께 대립하는 캐릭터로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장이기도 했다.
“친구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있게 찍어주고 싶었어요(웃음). ‘정도’라는 캐릭터 자체가 워낙 멋있는 캐릭터거든요. 그 캐릭터가 잘 살아야 영화가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정도와 평호의 긴장감이 잘 유지돼야 재미의 폭발력이 생기니까요. 그래서 더 잘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저 아저씨(정우성)가 하는 에너지만큼 나도 또 받쳐서 뿜어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죠. 여러 가지 복합적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감독으로 데뷔하긴 했지만 이정재는 배우로서의 자신과 연출자로서의 자신을 구분할 생각은 없다고 강조했다. 불편한 권위는 경계선을 나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자신만의 지론 때문이었다. 때로는 박평호의 모습 그대로 슈트와 구두까지 착용한 채 카메라 뒤에 서서 촬영본을 확인하기도 했고, 어쩔 땐 트레이닝복을 입고 산발한 머리로 현장에 나타나 감독 이정재로서 임했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 탓에 메이킹 필름을 촬영하던 스태프가 난감해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해주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연기자가 연기나 잘하지 뭔 연출이야, 감히’ ‘감독은 연출이나 잘하지 무슨 제작을 해? 돈 벌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명확한 구획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대가 정말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냥 ‘필름 메이커’라는 호칭이 가장 적합한 것 같아요. 어쩔 땐 배우가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감독이 배우도 할 수 있고, 그 무엇이든 영화 안에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죠. 한편으론 연기자가 하는 의견과 연출자가 하는 의견, 심지어 현장에 있는 막내의 시선으로 보는 의견도 다 같아야 하는 시기가 지금인 것 같아요. 옛날처럼 감독이 있고 그 밑에 누가 있고 하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요. 모든 사람들의 의견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기존 인식과 시각 자체가 변해야 하겠죠.”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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