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조선중앙TV 공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신. 연합뉴스 |
특히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동서고금의 전례에 미뤄 ‘김씨 왕조’를 구축한 북한의 3대 세습 과정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으로 비화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여기에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이 29세에 불과하고 지도자 수업을 받은 지도 겨우 1년 3개월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지도력과 맞물린 계파 간 권력투쟁은 극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만 북한사회에서 ‘북한 지도자=김일성 직계혈연’이라는 공식이 성립돼 있는 만큼 권력투쟁은 김정은을 정점으로 한 김 씨 혈족 간의 ‘피의 전쟁’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또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친인척들을 단계적으로 처단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어 이래저래 ‘피의 숙청’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의 장례절차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왕권 투쟁’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북한의 권력투쟁 속으로 들어가봤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위대한 영도자’ ‘위대한 계승자’ 등으로 표현하며 김 부위원장이 사실상의 새 지도자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37년간 철권통치를 했던 김 위원장 사후에 발생할 수 있는 계파 간 권력암투를 차단하고 불안한 민심을 조기에 수습하기 위한 전략이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가 연착륙하기까지는 거친 파고와 피의 숙청이 불가피할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당장은 김 위원장의 장례절차가 진행 중이고 국상기간이라는 점에서 권력투쟁이 가시화되지는 않겠지만 물밑에서는 ‘왕권’을 둘러싼 서바이벌 투쟁이 진행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는 12월 20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을 둘러싼 계파 투쟁이 시작됐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매체는 북한 전문가들이 장성택 김정남 김설송을 중심으로 한 3개 계파의 권력 투쟁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우선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국방위 부위원장인 장성택(65)이 이끄는 실세가 가장 중요한 계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성택은 중국과 의사소통이 활발해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 김경희는 김정일의 유일한 여동생이다. 김정은은 3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장성택과 김경희에게 자신의 권력기반이 안정될 때까지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고 이 매체는 전망했다. 김 위원장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평양을 시찰했을 때 장성택이 동행한 것은 그의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케리 브라운 영국 채텀 하우스(왕립국제문제연구소) 아시아 담당 수석은 “장성택이 ‘김정은 체제’ 초기에 중요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라고 전하기도 했다.
또한 이 매체는 김 위원장의 딸인 김설송(36)도 권력투쟁에 가세할 것으로 분석했다. 김설송은 김 위원장의 세 번째 부인이자 김일성 주석이 김 위원장의 공식 본처로 내정했던 김영숙(1947년생)의 첫째 딸이다. 김설송은 김 위원장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북한의 국가 선전부문에서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40)도 그의 영향력을 재건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설 것이란 관측을 내놓았다. 김정남은 지난 2001년 북한을 떠나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된 건을 계기로 김 위원장의 눈 밖에 나면서 사실상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2008년 김 위원장이 쓰려졌을 당시 김정남이 의사들을 부르고, 외국 귀빈들과의 만남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영접하기도 하는 등 위상회복을 꾀하려는 몇 가지 징후가 포착됐다고 이 매체는 보도했다.
<텔레그래프>의 분석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국내외 전문가들도 북한 내 권력투쟁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제하에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지난 2009년 1월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이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의에서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며 공식 등장한 뒤 후계자 수업을 받은 기간이 1년 3개월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왕권’ 장악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김 위원장의 후광 속에서만 활동했지 단독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국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전무하다.
이와 관련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12월 19일 “2010년 2월 만났던 커트 캠벨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김정은 체제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박 의원에 따르면 캠벨 차관보는 “김정은은 뿌리가 없다. 김정일은 김일성 생전에 상당 기간 후계 교육을 받았지만 김정은은 엊그제 후계자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당수 대북 전문가들은 김정은에 대항할 세력으로 형제들보다는 고모부인 장성택이나 작은아버지인 김평일 폴란드 대사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장성택은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이상 이후 비상정국을 수습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해왔고, 지난 2004년 숙청됐던 그의 측근들도 2010년 당대표자회 등을 거치면서 속속 복귀한 상태다. 또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을 맡고 있는 장성택은 공안·사법기관을 총괄하고 있어 핵심권력층 내 지지세력 확대 및 반대파 감시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장성택은 군부 실력자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대다수 대북 전문가들은 장성택이 김 위원장의 유지를 받들어 김정은 체제를 안착시키는 데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정일의 동생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 경공업부장이 김정은을 총력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젊은 김정은이 지도력과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과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장성택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김일성의 둘째 부인 김성애의 아들이자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 폴란드 대사도 김정은 체제를 위협할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김평일은 북한 주민들에게 신화적인 존재인 김일성 주석의 아들이다. ‘김일성 유훈통치’가 북한 정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일교포인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김정일의 셋째아들 김정은보다는 오히려 김일성의 아들인 김평일이 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김정일이 생전에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견제하면서 감금과 해외 파견 등 직간접적인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대북 전문가들은 김평일이 김정일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김평일이 절대 권력자인 김정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국제적 교육과 감각을 겸비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를 보호하는 ‘보이지 않은 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폴란드 대사 등 주로 해외에서 생활한 김평일이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층과 두터운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김평일은 김 씨 일가 중 가장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의 점진적 개혁개방을 유도하려는 중국과 주변국들이 상황에 따라 김평일을 지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북한 정권이 ‘김정은 3대세습’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김평일 또한 중국 지도층의 지원을 받으면 언제든 ‘왕권’을 넘볼 수 있는 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일 생전에 후계자로 지목한 김정은 또한 절대권력을 손에 쥘 때까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형제들이나 혈족들을 견제하거나 제거하는 ‘피의 숙청’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과연 북한은 김정은 체제로 안정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권력구도로 판이 짜일 것인가. 북한 정권 향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