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정부의 ‘정보지’(찌라시) 단속으로 이들 ‘기업정보맨’들의 활약이 잠잠해지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기업체마다 내부적으로 정보팀을 더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스팸메일 수준으로 나돌던 정보지가 없어졌을 뿐 ‘메모 교환’ 형식의 정보 유통이나 정보맨들의 활약은 더욱 커지고 있는것이다. 정치권에서 여야 세력균형이 팽팽하고, 삼성 편법재산증여-두산 비자금-한화 대생로비-SK사태 등 총수의 신변이 위태로운 사건이 줄줄이 벌어지고 있는 재계의 최근 상황이 정보전쟁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보력에서 가장 앞선 기업으로 평가받아온 삼성그룹은 한때 ‘정부의 개각 명단을 언론보다 먼저 알아낸다’, ‘파워엘리트 인사자료가 국정원 뺨치는 수준’이라는 신화를 듣기도 했다. 삼성이 국내 그룹들 중 가장 먼저 정보의 데이터 베이스화를 시도해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구조조정본부 기획팀 산하에 정보수집 담당자를 두고 있으며 삼성SDI 등 주요 계열사에서도 대외협력단 형태로 5~6명씩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 정보팀은 판공비를 무제한으로 쓰되 언제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내용을 모두 보고하게 돼 있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안기부 도청 문건 파문이나 이건희-이재용 부자 편법 상속 논란은 그동안 ‘최고’라고 자부해온 삼성 정보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이 파장은 삼성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른 대기업들에도 전이된 듯하다. ‘막강 정보력을 가진 삼성도 저런 일을 당하는데…’란 위기감이 다른 대기업들로 하여금 정보력 강화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 셈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정부 로비와 여론 탐지가 절실해진 대기업들이 최근 들어 소리 소문 없이 정보라인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 기업정서’를 바탕으로 한 정부부처와 정치권, 시민단체 등의 공세에 대해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이른바 ‘삼성 학습 효과’가 대기업들 사이에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다.
정보팀을 강화한 대표적인곳은 KT다. KT는 책임경영 체제 구축과 신규사업 강화를 목적으로 지난 9월1일 기존 사업협력실에서 국회 담당 라인을 분리해 대외전략실로 확대 개편했다. 특히 정보통신부 과장 출신인 윤재홍 전무를 대외부문 전문임원으로 선임해 남중수 사장을 보좌하게 했다. 대외부문은 사업협력실과 대외전략실을 총괄한다. 국회 담당 부서가 특화된 격인 대외전략실은 전 KTF 대외협력부문장인 오석근 상무가 실장을 맡아 남 사장의 KTF 사장 시절에 이어 재차 손발을 맞추게 됐다.
KT는 이번 정보라인 개편으로 그동안 해온 정보통신부와 국회 과학기술정보위원회 등 주무 부처 대상 업무에서 공정거래위원회와 소비자단체, 비정부기구(NGO)로 영역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KT는 이용경 사장 체제였던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로 부터 1천억원 이상의 과징금을 부과 받은 적이 있다. 시내전화와 전용회선 요금과 관련해 경쟁사와 담합을 한 것에 대한 공정위의 조치였다. 유무선 통합서비스 경쟁과 PCS 재판매 정책에 대한 정부와 시장의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판단되는 상황에서 KT는 보다 공격적인 정보 수집·분석을 통해 대정부 활동과 여론 몰이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KT와 통신시장 경쟁을 벌이고 있는 SK그룹의 경우 지난해 구성된 CR(Corporate Relations)전략실이 세를 떨치고 있다. 일종의 최태원 회장 ‘직할부대’ 성격으로 10명 이상 직원들이 이 조직 소속으로 정보 수집·분석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대외홍보가 주목적이지만 그동안 분식회계 사건과 소버린자산운용의 경영권 위협 등으로 약화된 최태원 회장의 입지를 강화하고 그룹장악 능력이 다소 떨어졌던 최 회장에 대한 밀착 보좌를 위해 구성된 팀으로 평가받는다. SK의 CR전략실은 구성된 지 얼마 안됐지만 언론사나 정보기관 출신 인사들에 대한 영입 등 그룹차원의 전폭적 지원하에 삼성에 필적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와 관련, 지난해까지 정보 시장의 최대 화제는 최태원 SK 회장의 거취와 소버린의 SK경영권 공격이었지만 최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거취’로 바뀐 점은 재계 정보팀의 안테나가 어디에 집중돼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최근 현대그룹 계열인 현대상선에서도 기존 홍보실 조직을 중심으로 정보 업무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상선은 최근 국회 보좌관 출신 인사 등을 영입해 국회 등 정치권에 외연 넓히기를 시도하고 있다. 요즘 들어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되는 공청회에 현대측 인사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는 최근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사태로 인해 통일부와 한바탕 마찰을 빚어야 했다. 대북사업 주체로 자리잡아온 현대그룹이 향후 현정은 회장 체제의 순항을 위해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정보수집 영역 확대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LG그룹에서 분리한 뒤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GS측도 정보라인 강화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GS 계열사인 GS리테일(구 LG유통)이 정보업무를 총괄하는 정보전담부서를 지난 7월에 신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화점과 편의점사업 등 소매 유통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GS리테일은 유통기획팀이란 부서를 새로 구성했는데 이들의 주 업무는 정보 수집·분석이라는 전언이다.
업계에선 이 팀이 유통업과 관련된 정보수집을 주로 담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GS리테일 내 사업부 등에서 요청이 있을 경우 일종의 싱크탱크 역할까지 겸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 팀은 LG그룹 내 정보수집 파트를 벤치마킹해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는 GS리테일 사업 관련 정보수집에 국한돼 있지만 GS그룹이 본격적인 성장을 꾀하면서 그룹 수뇌부를 보좌하는 정보전담조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힌다. LG그룹에서 분사해 기반을 닦은 GS그룹이 4대그룹을 향한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 정보라인 강화를 목표로 삼았다는 평이다.
이밖에 CJ는 지난해 말부터 국회에 정보 담당자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농심도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와 서울 이태원동 신축 건물 조망권을 둘러싼 갈등을 겪은 뒤 내부 정보팀을 강화했다. 매년 정기 국감에서 대한생명 인수 불법 로비의혹을 추궁당하고 있는 한화그룹도 최근 들어 국회 업무 등을 담당하는 정보팀 직원을 늘린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정보팀 강화 트렌드가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NGO 등 시민단체의 동향파악이 주요 업무의 하나로 추가됐다는 점이다. 소액주주 운동의 타깃이 됐던 삼성이나 SK는 물론, 현대차나 KT 등도 ‘전담 마크맨’을 두고 있다.
‘열사람의 입이 무쇠도 녹인다’는 말처럼 시민단체에서 이슈화시킨 기업관련 사안이 ‘언론 보도→시민단체 고발→보도→정치권 문제제기→사법처리’되는 형식으로 사안이 증폭되는 사례가 최근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