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지도부로 선출된 문성근 최고위원, 한명숙 대표, 박지원 최고위원. 박 최고위원은 호남 출신 정치인으로 유일하게 선출됐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마장동 우시장 민생탐방 후 현충원 참배! 대통령님! 이 순간 저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렵니까?”
지난 15일 민주통합당(민주당) 전당대회가 한명숙 당대표 선출로 마무리된 직후인 16일 새벽부터 오전까지 박지원 최고위원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지도부 경선 초기만 해도 한 대표와 함께 1위 자리를 다툴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한 대표는 물론 문성근·박영선 최고위원에게도 뒤진 데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70세의 고령에도 불구, 평소 술자리에서 폭탄주 10여 잔은 거뜬히 마시는 박 최고위원이 캔맥주 두 개에 취했다니 그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1·15전대 결과에 대한 실망감은 박지원 최고위원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그의 취중 토로는 많은 호남 지역 현역의원과 원외 인사들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광주 지역의 한 현역의원은 이번 전대 결과에 대한 소회를 묻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우리 동네 말로 ‘그냥 휑~허요’”라고 답했다.
그의 말 속에는 전대 결과를 두고 ‘호남 학살’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 대한 참담한 심정이 녹아 있었다. 2010년 구 민주당 전대 당시 선출직 최고위원 6명 중 4명(정동영 정세균 천정배 박주선)을 호남 정치인이 차지했는데 이번에는 달랑 1명(박지원)에 불과하고, 그것도 4위에 그쳤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간 듯했다.
호남 정치인들의 상실감과 충격이 큰 것은 단지 야권 힘의 중심이 친노(친노무현)그룹으로 옮겨간 것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힘의 이동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신들에 대한 ‘공천 학살’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더 크다. 그들에게 이번 전대 결과가 현실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전남 지역의 한 현역의원은 “이러다 ‘도로 열린우리당’이 되는 것 아니냐, 또 호남이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호남 정가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의원은 “당이 두 개로 쪼개졌던 2004년 총선은 차치하고 2008년 총선 때에도 호남 정치인들이 ‘공천 물갈이’의 희생양이 됐던 것 아니냐”며 “이번 전대 때에도 유독 호남에 대해서만 기득권을 내놓으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2008년 총선 당시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이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재출마를 준비 중이던 호남 현역의원 30명(염동연 전 의원은 자진 불출마) 중 8명에게 경선 기회도 주지 않고 탈락시킨 바 있다.
전남 담양·곡성·구례 선거구의 김재두 예비후보가 선거구 통폐합에 반대해 17일부터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도 이 같은 위기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나라당도 살리려고 하는 농촌 선거구를 왜 민주당이 없애려고 하느냐”고 항변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민주당이 영·호남 농촌 선거구 4개를 없애고 수도권과 강원, 충청 지역 선거구 4개를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는 데 대해 반발한 것이다.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를 위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호남 지역구를 양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호남 정치인들의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16일 민주당 새 지도부가 들어서자마자 대표단 기자회견을 열고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거론하며 총선 연대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전국 단위가 아니라 권역별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정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차용해 권역별로 당지지도에 걸맞은 숫자의 지역구를 통합진보당 몫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통합진보당의 현 지지율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한때 울산 지역에선 30%, 호남에서도 10% 이상의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야권연대에 적극적인 민주당 지도부가 통합진보당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호남 지역구 3~5개를 양보해야 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한명숙 대표 체제가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공천 쇄신에 나설 경우 호남 정치인들의 집단 반발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당내에서 일고 있는 ‘호남 중진 용퇴론’에도 불구하고 김영진 김충조 박상천 의원 등 5선 의원 전원이 총선 출마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광주 지역의 한 재선의원은 “이번 전대 때 호남의 기득권 포기를 주장했던 후보들 중에도 한 선거구에서 3번, 4번 연거푸 공천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은 수도권이라고 계속 공천을 받으면서 왜 선거 때만 되면 호남 의원들만 희생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 의원은 “이런 식으로 선거를 치렀다간 결국 호남은 중진의원이나 지도자급 인사 하나 없이 초·재선 의원만 넘쳐나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호남 정치인과 정가의 여론이 곧 호남 여론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DJ뿐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도 호남의 사랑을 받은 지도자이고, 따라서 친노그룹이 당의 주류로 부상했다고 해도 그 자체로 호남 소외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광주 지역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한 원외 인사는 “당 지도부에 전국 각지 출신이 골고루 들어가고, 총선에서도 취약지인 영남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출마하기로 한 것은 민주당의 전국정당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여기에 딴죽을 걸었다간 자칫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역을 팔아먹는 정치인으로 몰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사실 이번 전대를 통해 호남 현역의원들이 얼마나 경쟁력이 없는지가 다시 한 번 확인됐다”면서 “호남의 민도가 원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고 교체할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이지 선거철마다 물갈이 대상에 오르는 현역의원들이 아니다”고 목청을 높였다.
박지원 최고위원이 1·15 전대 후 자신의 일련의 행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자 곧바로 해명에 나선 것도 이 같은 지역 기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 최고위원은 한 민주당 지지자가 트위터에 “제발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글을 올리자 “균형 있게 모든 세력이 화학적 통합으로 승리하자는 의미”라며 “총선 승리, 정권 교체를 위해 할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화답했다. 이는 대놓고 불만을 터뜨릴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호남 정치인들의 현 처지를 반영하는 듯했다. 호남 정치인들에게 이번 겨울은 더없이 춥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박공헌 언론인
보이지 않는 손? 그냥 멘토야
때는 4·11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본격적인 공천 체제로 들어가야 할 민감한 시기. 이 때문에 ‘이해찬 섭정 논란’은 단지 민주당 지도부 선출 과정에서 이 전 총리가 막후 역할을 했다는 수준을 넘어 향후 민주당이 사실상 친노그룹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라는 추론으로까지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 전 총리가 실제로 섭정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제쳐두고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에 대한 구 민주계 및 호남 정치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반영한다. 여기에 야권통합 과정에서 보여준 이 전 총리의 적극적인 역할, 또 최근 그의 거침없는 언행이 중첩된 결과물로 보인다.
이 전 총리는 명실상부한 친노그룹의 좌장. 그러나 반대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명맥을 잇는 호남 정치인들은 물론 손학규·정동영 상임고문 등 당내 대선주자들과도 껄끄러운 관계다. ‘친노그룹 빼곤 사방이 온통 적’이라고 보는 게 맞다.
호남과의 악연은 지난 2003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떨어져 나올 당시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 창당의 배후 중 한 명으로 지목됐었다. 분당 전 마지막으로 열린 새천년민주당 당무회의 때 웃옷을 벗어던진 한 열성 당원이 이 전 총리의 멱살을 잡고 흔든 게 이른바 ‘난닝구 사건’이다. 이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등으로 노무현 정부와 호남 정치인들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었고, 이 과정에서 이 전 총리는 더 ‘미운 털’이 박혔다.
손학규 고문과는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부터 틀어졌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제3지대에 머무르던 손 고문이 대통합민주신당에 결합하자 이 전 총리는 ‘굴러온 돌’ 운운하며 날선 각을 세웠다. 급기야 2008년 손 고문이 당대표로 선출되자 탈당이라는 강수로 맞서기도 했다. 정동영 고문도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청와대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이 전 총리와 관계가 소원해졌다.
구 민주당 출신들로선 이 전 총리의 등장 자체가 반갑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 전 총리가 지난해 야권통합추진기구 ‘혁신과 통합’ 결성을 주도하고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것은 구 민주당 출신들의 경계심을 증폭시켰다. 이 전 총리는 야권통합으로 민주당이 탄생한 뒤에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정권 교체 구상 등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구 민주당 출신들이 자극받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전 총리가 지난해 초부터 지인들에게 “야권통합정당을 만들어 당권은 한명숙, 대권은 문재인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얘기부터 1·15 전대 때 한명숙 대표와 문성근 최고위원의 출마를 종용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구 민주계의 한 관계자는 “대중성이 없기 때문에 이 전 총리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막후에서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과거 전력으로 볼 때 그 과정에서 호남 정치인들을 ‘구악’으로 몰아세울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이 전 총리 측은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전 총리의 한 측근은 “정권 교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하지만 경륜 있는 원로로서 막후에서 멘토 역할을 하는 데 그칠 것”이라며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