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 반복하고 질문에 역질문 ‘4차원 화법’ 웹상 유행…한때는 ‘자민당 프린스’, 일부러 어리숙한 척 분석도
“기후변화와 같은 큰 문제를 다룰 땐 즐겁고(Fun), 쿨하고(Cool), 섹시해야(Sexy) 한다.”
2019년 9월, 환경성 장관이었던 고이즈미 신지로의 발언이다. 당시 그는 유엔 기후변화정상회의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해당 발언은 전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인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의 슬로건 “환경문제에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사회적 이슈는 대중적인 관심과 지지를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 말이다.
이후 기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책이냐”고 묻자, 신지로는 두루뭉술 넘어가며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 한마디는 “적당히 빠져나가려 한다” “일국의 대표로 나간 정치인인데 답변이 부끄럽다”는 등의 비난과 함께 일본 웹상에서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화 됐다.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돼 ‘펀쿨섹좌’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신지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80)의 차남이자 자민당 중의원(5선)이다. 2009년 중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9년 아베 내각에서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환경성 장관에 임명됐다. 일본 역대 최연소 남성 장관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후광과 준수한 외모 덕분에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정치계의 아이돌’ ‘자민당의 프린스’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녔으며, 차세대 총리 후보를 묻는 호감도 조사에서는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장관에 발탁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지지율이 급격히 추락한 것.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언론 노출이 늘어났고, 그때마다 엉뚱한 발언으로 논란의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일본 정치인에게 흔히 보이는 ‘성희롱’이나 ‘갑질’ 같은 실언이 아니라, 4차원 화법이라는 데 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 수치에 대해)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46이라는 숫자가.” “지금처럼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처럼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반성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고 반성합니다.”
이를 두고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고이즈미 신지로처럼 말하는 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화법은 간단하다. 먼저 “A는 B다. 왜냐하면 A는 B이기 때문이다”처럼 동어를 반복한다. 예를 들어 “바다에 왔으니까 바다에 가자” “저는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등등 일종의 순환논법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뻔한 말을 쓸데없이 비장한 척 포장한다”고 해서 “고이즈미 신지로 포엠(Poem·시)”이라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후쿠시마 오염토의 최종 처리장을 후쿠시마현 바깥에 30년 내로 마련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공약이 발표됐다. 이에 대해 신지로는 기자회견장에서 “30년 후면 나는 몇 살일까. 지진 직후부터 생각해 왔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신지로는 “그 30년 후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어떨지, 일단락을 지켜볼 수 있는 정치가라고 생각한다”는 다소 생뚱맞은 발언을 했다. 기자가 구체적으로 “공약 실현이 가능하다면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이번에는 “하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라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고선 그윽하게 고개까지 끄덕였다. 역시 환경 장관으로서 제시해야 할 알맹이는 쏙 빠진 답변이었다. 이 장면은 일명 ‘고개를 끄덕이는 짤(이미지 파일)’로 인터넷에서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사업가이자 유튜버로 활동하는 히로유키는 “일본의 정치인과 관료는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가장 출세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고이즈미 신지로의 인기가 대단했지만, 환경 장관이 되고 일을 하면서부터 평가가 폭락하지 않았느냐”며 일침을 가했다.
사실 신지로는 과거 선거유세 현장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언변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일부 네티즌들은 “신지로가 일부러 어리숙한 척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자민당 내에서 아직 파벌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견제를 피하기 위한 속임수 같다”는 설이다.
이와 관련, 할리우드대학원대학의 사토 아야코 교수는 “준비하고 임하는 연설에서는 명료하게 말하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엔 신지로가 진의를 숨기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일종의 방어 반응일 수 있다”고 화법을 분석했다.
현재 고이즈미 신지로는 장관직에서 물러나 세간의 주목도는 예전만큼 높지 않다. 하지만, 일본 매체 주간여성프라임에 따르면 “틱톡에서 ‘고이즈미 신지로 어록’을 정리한 동영상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매체는 “10~20대들에게는 여전히 ‘황당어록 제조기’로서 명성이 건재하다”고 덧붙였다.
최근 일화도 공개됐다. 9월 4일 이바라키현에서 열린 기후변화대책 에코 포럼에 참가한 신지로는 어린이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한 어린이가 “어떻게 하면 빈곤을 없앨 수 있나요?”라고 묻자, 신지로는 “몇 살이냐”고 되물었다. 아이가 “여덟 살”이라고 답했고, 신지로는 또다시 “왜 빈곤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가”를 질문했다. 아이는 “SDGs(지속가능한개발)에 대한 책을 보다가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자 신지로는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과 희망을 느끼게 됐다”고 감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포럼은 막을 내렸다. 요컨대 아이의 질문인 ‘빈곤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서는 역질문을 해 화제를 바꿨고, 결국 신지로는 아무 답변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 일화는 ‘질문에는 역질문’이라는 새로운 예시로서 ‘신지로 화법’에 추가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지로의 아내는 유명 아나운서 출신인 타키가와 크리스텔이다. 한쪽에서는 “신지로가 아내에게 스피킹 지도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주간여성프라임은 “인터넷상에서는 놀림이 되고 있지만, 어쨌든 이슈 몰이에는 성공했다”면서 “지역 유권자들에게는 여전히 인기가 높아 ‘고이즈미 신지로가 언젠가 총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고 전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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