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입금해 계좌 묶은 뒤 해지 명목 거액 요구…지급정지 의무 없는 선불충전업체 통한 사기도 기승
보이스피싱과 전혀 상관없는 자영업자인 A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돈을 피해자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카카오뱅크 측은 “반환은 불가능하다. 피해자 측에서 서면으로 신고확인서를 제출하고 합의를 보면 정지는 3~4개월 내에 풀릴 것”이라며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변을 내놨다.
은행의 이 같은 대처에 A 씨는 직접 방법을 찾아 나섰다. 온라인상에서 비슷한 피해사례를 찾아냈고,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 입금자명과 동일한 계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A 씨는 “해당 계정에 대화를 시도했더니 ‘150만 원을 주면 지급정지를 풀어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며 “셀카를 보내보라든가 예쁘면 지급정지 풀어준다는 등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6일 카카오뱅크 금융사기팀 관계자가 뒤늦게 A 씨에게 전화를 걸어 “계좌로 입금한 분은 실제 보이스피싱 피해자이고 보이스피싱 사기범이 피해자의 휴대폰을 해킹해 고객의 계좌로 15만 원을 송금한 것”이라며 “자금 반환동의서를 작성하면 피해자 분과 중개역할을 해주겠다”고 전했다. 은행의 늑장 대처에 며칠간 속앓이하고 생업에도 지장을 겪었던 A 씨는 “카카오뱅크 측에서 처음에 제대로 안내를 해주지 않았던 점에 대해 거듭 사과했지만 지난 며칠간 너무 막막하고 괴롭고 힘들었다”며 심경을 전했다.
A 씨의 피해 내용은 이른바 ‘통장사기’의 전형이다. 보이스피싱 계좌로 추정될 경우 금융회사가 계좌를 정지 조치할 수 있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을 악용한 새로운 사기 수법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사기범들은 피해자에게 접근해 지급정지를 풀려면 돈을 달라고 금품을 요구하기도 하고, 원한을 산 상대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통장사기를 이용한 ‘통장협박’을 권하기도 한다. 기존에는 온라인 불법 도박 사이트 이용자를 대상으로만 통장사기가 행해졌으나 최근에는 계좌번호가 온라인상에 노출된 자영업자들이 표적이 되고 있다고 금융당국은 설명했다.
앞의 사례가 지급정지 제도를 악용한 사례였다면, 지급정지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신종 보이스피싱 사례도 있다. 카카오페이, 토스 등 선불충전업체를 이용한 보이스피싱이다. 입출금 거래실적을 쌓으면 저리로 대출해주겠다는 대출빙자형 사례, 자녀 및 지인 사칭형 사례, 검찰 직원 사칭 등 정부기관 사칭형 사례 등이 선불충전업체를 이용해 이뤄지고 있다. 선불충전업체는 금융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보이스피싱 계정 지급정지조치 의무가 없다. 이에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금융회사가 아닌 선불충전업체를 통해 피해 금액을 송금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선불충전업체(매출액 상위 10개사 기준)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범죄 건수는 2017년 3건에서 2021년 9292건으로 310배나 폭증했다. 피해 금액도 1000만 원에서 87억 9000만 원으로 293배 늘었다. 2017~2022년 6월 말 기준 매출액 상위 10개사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범죄 건수 대비 토스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범죄 건수의 비율은 66.5%, 카카오페이는 26.3%, 한국문화진흥이 3.2% 순이었다. 피해 금액도 같은 기간 토스가 64.4%로 가장 많았고, 카카오페이 32.5%, 네이버파이낸셜이 1.6% 순이었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거나 악용한 사기는 계속 발생하는데, 금융당국은 현황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감독원(금감원) 불법금융대응단 관계자는 “통장사기 사례는 비교적 최근 들어 발생한 신종 사기 수법으로 피해자와 사기범 간의 의사소통만으로 이뤄져 현황 파악이 어렵다”며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시중 은행 관계자는 “통상적인 매뉴얼대로라면 보이스피싱 연루 계좌를 해제하려면 소명 절차를 거쳐야 가능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입금이 됐다면 즉시 은행으로 연락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밝혔다.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보이스피싱 범죄에 노출된 선불충전업체의 대처 상황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사각지대를 악용한 보이스피싱을 막기 위한 제도 보완과 선불충전업체 이용 소비자를 대상으로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한 홍보를 강화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의 금감원 불법금융대응단 관계자는 “개인정보 노출에서 사기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자영업자가 거래 목적으로 포털 등에 계좌번호를 적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사기범들의 공격 대상이 된다”며 “평소 계좌정보 관리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 작업에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접목해 신종 사기수법에 대한 금융회사 대응력이 제고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금융회사들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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