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자택을 방문한 정대철 대표와 환담하 는 김대중 전 대통령. 국회사진기자단 | ||
DJ는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선언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민주당 구주류와 호남민심, 언론 등을 활용한 고난도 정치를 펼치며 정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DJ가 퇴임 이후 상당기간 외부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란 일반 예측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분석이다. DJ는 ‘동교동 정치’를 통해 기반이 허약한 노 대통령의 ‘청와대 정치’를 압도하는 양상이며, 정치10단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항간에는 ‘손오공이 재주를 부려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듯, 노 대통령이 뛰어봐야 김 전 대통령 손바닥’이란 풍자마저 나돌고 있다.
DJ의 정치행위는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특검수사 탓에 불거진 측면이 강하다. DJ는 특검의 칼날이 박지원, 임동원씨 등 핵심 측근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다가오자 어떤 식으로든 방어에 나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
홍업·홍걸 두 아들이 모두 사법처리된 상태에서 다시 장남인 김홍일 의원마저 위험한 상황이 돌출하면서 심리적 압박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히 DJ가 양보하지 못하는 마지노선은 햇볕정책과 남북문제다. 이는 노벨상을 가져오게 했고 DJ를 ‘평화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하게 만드는 기본 토대다. DJ는 특검수사를 통해 이 같은 남북화해 노력이 법의 잣대에 ‘유린’된다고 판단, 못견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DJ의 심기가 처음 표출된 것은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방문을 받으면서다. DJ는 6월10일 전격적으로 박 대표의 방문을 허락했다.
불과 한 달 전쯤 민주당 정 대표의 방문을 거절했던 DJ가 박 대표의 방문을 허락한 것은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DJ가 세상을 향해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며, 특히 한나라당에 도움을 청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냐는 추정을 낳게 했다.
DJ가 5월 중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건강악화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DJ는 지금도 일주일에 2~3회씩 병원에서 투석치료를 받을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럼에도 DJ는 박 대표와 정 대표의 만남에 이어 언론인터뷰 등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에 나서고 있다.
DJ는 박 대표에게 ‘지역감정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 이루지 못했다’는 화두를 꺼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전라도 사람들이 밀어서 당선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에게 상당한 압박을 주는 발언이다.
▲ 동교동에서 만난 정대철 대표와 DJ. 국회사진기자단 | ||
DJ는 이틀 뒤엔 KBS와 전격적으로 인터뷰를 가졌다. DJ는 여러 언론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으나 최종적으로 KBS를 선택했다. 효과와 상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공영방송사를 택한 것으로 이해됐다. 철저한 계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발언 역시 준비된 내용이었다.
DJ는 “국가와 우리 경제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부정, 비리가 없는데도 사법처리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당시 책임자로서 참으로 가슴 아픈 심정”이라고 말했다.
DJ는 “대북송금 문제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에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퇴임 후 특검 수사를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은 처음이다. 특검수사 연장(기한 6월25일)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청와대를 압박한 것이다.
DJ는 또 “노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서 노 대통령에게 직설법으로 국민의 정부 대북정책을 이어받을 것을 주문했다.
이날 인터뷰를 진행한 소설가 김주영씨에 따르면 DJ는 또렷하게 한치의 실수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를 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DJ가 정당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과 동시에 동교동계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정치권에선 민주당 한화갑 전 대표가 노 대통령을 비난하고 신당창당 반대를 선언한 것도 DJ의 의중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동교동계 출신들은 최근 들어 부쩍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에 앞장서고 있고,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한화갑 전 대표는 6·15 3주년 개인 성명을 발표, “민족화해와 상생의 길을 개척한 주역들을 단죄할 수 없다”며 “냉전과 대결구도를 깨기 위한 정상회담을 범죄행위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균환 총무는 아예 노 대통령이 햇볕정책 계승 공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에선 동교동계 및 구주류 의원뿐 아니라 중도파 의원까지 특검 반대에 가세하는 등 오히려 노 대통령 주변의 신주류가 포위되는 형국이다. 강금실 법무장관조차 국회에서 “나는 특검에 반대했던 사람”이라며 특검수사에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 DJ와 동교동계의 공세에 노무현 대통령과 신주 류가 밀리는 모양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의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조차 6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천명하고 나섰다. 청와대는 문 실장의 이 같은 견해를 브리핑하면서 이례적으로 개인의견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개인의견을 낼 만큼 노 대통령의 입지는 약화된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간 데는 DJ라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노 대통령은 정치개혁과 새로운 세력 결집을 외쳤지만 성과 면에선 아무런 결과물을 내지 못한 꼴이다. 신주류의 입지가 강화된 것도 아니고, 세를 더 넓힌 것도 아니다. 노 대통령 진영이 추구하던 ‘탈DJ프로그램’도 사실상 중단되는 게 아니냐는 추정을 낳고 있다.
추미애 의원이 오랫동안 신당 창당에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버틴 것도, 현 여권의 지원 부족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DJ와의 관계를 의식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아직도 DJ의 의중에 따라 절대적 영향을 받는 유권자들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구주류가 노 대통령과 대립할 수 있는 것도, 중도파가 버틸 수 있는 힘도 모두 호남표에 기대고 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김 전 대통령을 전격 방문하고, 동교동계 의원들과 교류를 넓히는 것은 노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민주당 분열을 촉진시키는 부수효과를 낳고 있다. 박 대표는 최근 들어 한화갑, 김옥두 의원 등 김 전 대통령 측근 의원들과 부쩍 잦은 교류를 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DJ의 행동반경은 특검수사에 국한되지 않고 신당창당과 정계개편 등 향후 정치적 변동과 넓게는 남북관계에 대한 ‘훈수’로까지 넓어질 것이란 분석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 전 대통령측의 움직임은 퇴임 이후 자신의 측근 그룹이 급격히 무너져내린 김영삼, 노태우 정권 등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DJ가 기반이 허약한 노 정권의 틈새를 벌리고 현실정치의 주요한 한 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