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도 시점도 부적절한 문건 어디까지 보고됐는지, 누가 왜 유출했는지 경위도 들여다봐야
11월 1일 SBS는 경찰이 만든 ‘정책 참고 자료’라는 내부 대외비 문건을 입수해 보도했다. 문건은 ‘이태원 사고 관련 정부 부담 요인에 관심 필요’ ‘이태원 사고 관련 주요 단체 등 반발 분위기’ ‘이태원 사고 관련 온라인 특이 여론’ ‘산업현장 안전관리 구조적 문제 개선 필요’ ‘지자체 안전 한국 훈련 대비 실태 및 현장 요망사항’ 등 5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중 3개가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정부 부담 요인에 관심 필요’ 항목엔 ‘향후 보상 문제가 지속적으로 이슈화될 소지가 있다며 빠른 사고 수습을 위해 장례비와 치료비, 보상금과 관련한 갈등 관리가 필요하다. 국민 애도 분위기 속 성금 모금을 검토하고 정부도 동참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어 지난 2014년 발생한 판교 환풍구 추락 사고를 거론하며 ‘(보상 문제는) 외부인 참여가 늘어날수록 협의가 어려워진다. 초기에 가족 대표를 정해 대화 창구를 단일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요 단체 등 반발 분위기’에선 ‘일부 진보 성향 단체들은 세월호 이후 최대 참사로, 정권 퇴진 운동으로까지 끌고 갈 수 있을 만한 대형 이슈라며 긴급회의 개최 등 대응 계획을 논의 중’이라며 ‘섣부르게 정권 책임을 내세웠다 역풍 가능성이 있는 만큼, 당분간 상황을 주시하며 신중 검토 방침’이라고 썼다.
‘온라인 특이 여론’은 ‘정부의 안전관리가 미흡했다는 정부 책임론’이 부각될 조짐이 있다. 정부 책임 관련 보도량이 9건에서 108건으로 대폭 증가했고,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들도 심층 보도를 준비 중’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두고 경찰이 시민단체 등을 사찰해 문건을 만든 것 아니냐는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과거 정보 경찰로 회귀했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문건에 등장하는 시민단체들은 11월 3일 대통령실 앞에서 ‘이태원 참사 시민사회 여론동향 문건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을 규탄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경찰청 문건엔 ‘전국민중행동은 박근혜 정부 당시 세월호 책임자들을 단죄하지 않은 검찰과, 그 연장선에서 들어선 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태원 참사를) 제2의 세월호 참사로 규정해 정부를 압박한다는 계획’이라고 돼 있다.
3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전국민중행동 박석운 공동대표는 “경찰청 문건을 보면 전국민중행동, 민주노총 등 진보단체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사태를 끌고 갈 수 있다고 나와 있다”며 “전국민중행동은 이런 논의를 하거나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정부가 시민사회단체들에게 책임을 넘기면서 프레임을 조장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청은 “경찰관직무집행법에 공공안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돼 있고, 대통령령에도 경찰이 정책 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다”며 “통상적 수준에서 취합한 것으로 사찰한 것은 전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 고위 관계자도 “내용을 보면 특별한 게 없다. 여기저기 긁어모아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해 보인다. 통상적인 정보 생산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보국 출신 전직 경찰 관계자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그는 “평시라면 인터넷이나 기사 등을 참고해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온 국민이 분노하고 슬퍼하는 대형 참사 후다. 군대로 치면 전시 상태다. 문건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야말로 ‘공공안녕’에 직결되는 정보다. 이거를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까”라면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접촉해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후 사찰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문건 자체의 법적 문제는 차치하고 작성 시기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따가운 시선도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11월 2일 성명서를 내고 “경찰은 적법한 직무 영역이고 직무 행위라지만 과연 이런 행위가 지금 경찰이 할 일인가”라고 꼬집었다. 온 국민이 애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의 처신이 부적절했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통화에서 “공공안녕을 위해 정보를 수집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그런 혼란이나 사고를 대비한 정보는 과연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공공의 안녕이냐”고 되물었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11월 2일 BBS ‘전영신의 아침저널’에 출연, “지금 이태원 참사로 인해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져 있는데 경찰이 그것을 수습할 것인가,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것에 총력을 집중해도 모자랄 이 시기에 시민단체 등을 내부 사찰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은 국민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보여진다”고 질타했다.
야권은 문건 생산 및 보고 라인 등에 대한 진상 파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경찰이 자체적으로 문건을 만들었는지, 또 문건이 실제 어디로까지 보고됐는지 등이다. 복수의 경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문건 형식은 내부가 아닌, 상급기관 보고용이라고 전해졌다. 경찰청 상급기관은 행정안전부, 국무총리실, 대통령실 정도다. 앞서의 전직 경찰 관계자는 “이런 시기에 정보요원이 독단적으로 이런 내용의 문건을 만들었을지는 의문”이라면서 “누가 왜 이런 성격의 문건을 작성하라고 했는지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2 신고 녹취록’ 공개 후 거센 책임론에 휩싸인 경찰과 여권은 곤혹스러워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이런 가운데 문건이 어떻게 유출됐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건 작성 직후에 누군가가 특정 의도를 갖고 외부로 흘려줬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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