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한 단풍이 지고 어느덧 저만치 마중 나온 겨울. 홀로 여름인 양 초록빛으로 겨울을 맞는 것이 있다. 속이 깊고 단단한 '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국부터 조림, 반찬, 김치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천의 얼굴. 이름은 없을 무. 존재감은 있을 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깊은 맛의 '무'를 만나본다.
해발 650m, 산꼭대기에 우뚝 솟은 경북 화산마을. 이곳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자라나는 것은 오로지 무와 배추뿐이다. 일교차가 큰 고랭지인 만큼 달고도 단단한 무가 만들어진다는 이곳에서 20년째 무 농사를 짓고 있는 혜숙 씨. 오늘은 제 자식만큼이나 대견한 무를 첫 수확 하는 날이다.
혜숙 씨에게 무는 사과와도 같은 존재. 과일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무를 깎아 먹지 않았던 집이 어디 있으랴. 어려운 시절 무는 과일이었고 집집마다 상비돼 있는 천연 소화제였다. 말려서 무말랭이를 만들고 시원한 동치미를 담그면 겨우내 든든한 식량이 돼주기도 했다.
무는 갖가지 국에 들어가 시원한 맛을 내주기도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뭇국'이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맑은 소고기 뭇국을 먹지 않는다. 고춧가루를 넣어 육개장마냥 매콤하고 칼칼하게 먹는다. 단, 제사 때만 하얀 소고기 뭇국을 올린단다.
무가 인삼보다 낫다는 이맘때. 혜숙 씨가 꼭 만드는 음식 중 하나는 '무 조청'이다. 무를 갈고, 삭히고, 졸이는데 무려 7일 정도 걸린다는 겨울의 보약 '무 조청'은 오랜 시간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줬다고 한다. 거기에 시어머니가 명절마다 찾았던 '무전'까지 혜숙 씨네 가족의 겨울을 책임져줄 든든한 무 밥상을 만나본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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