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정주영 회장(오른쪽)과 동생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 ||
한때 21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재계 12위를 기록했던 한라그룹은 IMF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그룹이 해체됐다. 현재는 한라펄프제지, 한라아이앤씨 등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룹의 명맥을 잇고 있는 대형업체는 한라건설 뿐이다. 오너인 정몽원 회장이 한라시멘트의 지분 46.8%, 그의 형인 정몽국 전 배달학원 이사장이 한라해운의 주식 13%를 가지고 있다.
한라건설이 재기의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은 만도 인수전. 옛 한라그룹의 계열사였지만 99년 그룹의 부도로 자금난을 겪다가 JP모건 등이 합작한 투자사 선세이지에 6천억원에 매각됐다.
선세이지는 지난해 5월5일 만도를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만도의 지분구조는 선세이지 73.11%, 한라건설 9.27%,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 9.27%이며, 나머지 8.35%는 한라건설 임직원이 보유하고 있다. 한라건설 우호지분이 26.89%로 나머지 24%의 지분만 확보해도 만도의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는 셈이다. 한라건설도 창업주인 정인영 명예회장(정몽원 회장의 아버지)이 직접 만도 인수를 지시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그렇지만 현대자동차도 만도 인수전에 뛰어든 상황이라 향후 만도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선세이지의 매각 발표 후 외국계 자동차 부품 회사인 지멘스, TRW, 컨티넨탈이 인수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선세이지측은 인수경쟁에 불을 붙이는 한편 JP모건은 만도의 매각가격이 2조원이 넘는다고 발표하며 몸값을 불렸다. 그러나 현대자동차가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이들 세 업체는 손을 놨다. 만도의 생산물량 70%가 현대차에 납품되는 이상 현대차와 경쟁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여름 만도와 같은 품목을 생산하는 부품회사 카스코를 인수해 놓았기 때문에 만도에 대한 납품을 무기로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매각가격을 7천억원대로 낮춘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11월부터 기업실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최근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정몽구 현대차 회장(왼쪽)과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 | ||
한라건설은 인수를 위한 유보금으로 현금 3천억원을 준비해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다, 만도 인수에 나설 경우 추가 자금도 쉽게 모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한라건설은 이미 지분을 많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필요한 비용은 그리 많지 않다.
현대자동차가 인수 가격을 낮추면 낮출수록 한라건설은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인수전에서 현대자동차와 맞선다면 추후 납품물량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 또한 한라건설과 우선인수권에 대한 양해를 최종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 오너인 정몽구 회장과 그의 삼촌이 되는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과 이미 사전 합의가 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만도의 인수와 관련해 주변에서는 지난해 초 현대가 가족들이 모여 현대건설과 만도에 대한 인수 논의가 오갔다는 얘기가 돌고 있기도 하다.
한라건설측은 이에 대해 긍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인영 명예회장이 현재 집안의 가장 큰어른이고 현대자동차의 모태가 된 현대건설 창업의 일등공신이다 보니 정몽구 회장이 이에 대한 예우를 해 줄 것이라는 얘기다. 최근 정 회장이 사촌동생인 정몽혁씨(고 정신영씨 장남)에게 현대자동차 계열사인 아주금속 대표이사를 맡겨 가족사랑의 일면을 보인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게 만도는 충분히 매력적인 매물이다. 연매출 1조5천억원 규모의 만도를 상장시킬 경우 큰 차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비스가 상장 후 2주 만에 주가가 4배 이상 급등해 대주주인 정몽구 회장(28.1%)과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31.9%)이 공모가 대비 1조원이 넘는 평가차익을 얻은 바 있다. 경영권 승계가 절실한 현대자동차로서는 만도에 욕심을 낼 수도 있다.
한편 한라건설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새론오토모티브와 만도를 트레이드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돌기도 했다. 새론오토모티브는 만도에 브레이크패드 등의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로 한라건설이 32.84%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새론오토모티브는 매출액 8백63억원으로 1조5천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만도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으로 교환 대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만도나 새론오토모티브의 성적은 최근 기대이상이다. 때문에 한라가 자동차를 지렛대 삼아 다시 한번 제국의 꿈을 실현할지, 아니면 현대차가 냉정하게 부품 라인업을 ‘정리’할지 주목받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